금년은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 70여명이, 지금은 가고시마(鹿兒島)로 불리는 일본 서남부의 사쓰마(薩摩)에 끌려와 일본도자기의 대명사가 된 사쓰마 도자기를 일으킨지 4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조선 도공들의 작품이 세상을 놀라게 한 이래 ‘Satsuma’라는 낯선 이름이 일약 세계에 퍼지게 되었고 이는 일본 도예사에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기회에 일본 친구들에게 칼을 만드는 도공(刀工)과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陶工)은 일본어로 발음이 다같이 ‘도코’이나 일본역사와 한일관계에 끼친 영향은 전혀 판이했음을 지적해 주고 싶다.
지금도 가고시마현에는 도요가 80여개나 된다. 오사코 게이키치(大迫惠吉)라는 이름보다는 제14대 심수관(沈壽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도예가가 70대의 고령에도 가고시마에서 4백년의 시공을 초월한 조선의 얼이 스며있는 작품 제작에 정력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가고시마 현당국과 시민단체들은 2,3년전부터 금년도 행사준비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하여 마침내 10월말부터 ‘불꽃은 강하게 마음은 뜨겁게 유대는 깊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념전람회 도요지순례 한일도예가 교류 등의 다채로운 행사를 연일 펼치고 있다. 11월29일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석탑 제막식을 끝으로 30여일에 걸친 기념 축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10월초 규슈의 중심지 후쿠오카(福岡)에서 심수관선생의 특별강연과 작품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때 8백만∼9백만엔을 호가하는 선생의 작품이 동이 날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심수관선생은 적어도 이곳에서 조선도예의 자존심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행사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심수관선생과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는 히가시(東)시 이치키초(來町)에서 이곳의 도예가들이 공동으로 만든 가마에 도공의 고향인 남원에서 채화한 불을 지핀 것이다. 도공들이 전란의 와중에도 유약은 약간 몸에 지니고 왔었으나 불은 어쩔 수 없이 두고 올 수밖에 없었을 게다. 망향의 한을 안고 타계한 분들의 영전에 때늦게나마 고향의 불꽃을 올려 그들의 넋을 위로하려는 애틋함이 묻어난다.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을 받드는 다마야마(玉山)사당의 제단 촛대에도 옮겨진 그 불꽃은 서럽게만 느껴졌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최진영 남원시장의 ‘대감’다운 행차의 모습과 한풀이의 춤사위를 풀어내는 우리 무용수의 고운 자태는 TV매체를 통해 규슈에서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일한 우호의 불꽃’이라고 새겨진 점화대에 붙여진 불꽃은 새로운 시대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오래도록 타오르게 되었다. 규슈지역 TV 신문 등은 다투어 행사의 이모저모를 연일 보도하고 있다. 규슈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불경기의 한파에도 불구하고 5백만엔의 거금을 기꺼이 이 행사 준비를 위해 내놓았다. 한일 음식문화 교류, 한일교류의 밤, 국립관현악단 연주, 전북무용단 공연 등의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져 규슈지방이 가깝고도 가까운 한일관계의 중심에 있음을 1천3백만 규슈지역 주민들이 피부로 느끼게 된 것도 큰 성과중 하나이다.
다만 사쓰마 도자기의 고향인 남원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칠 수 있는 도예가를 배출하지 못한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서현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