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내수시장, 북한 진출의 교두보, 다양한 업종 진출을 시도할 수 있는, 시장선점 효과가 큰 기회의 시장’.
94년 국내 A그룹이 작성한 대외비 문서 ‘중국 진출전략’의 첫 머리에 나오는 문구다. 인구 12억을 거느린 광활한 중국시장의 전략적 가치를 이렇게 표현했다.
A그룹 뿐 아니다. 5대그룹은 물론 중견 그룹들도 너도나도 중국 시장에 사운(社運)을 걸다시피 했다. ‘12억명이 1년에 한번만 마셔도 12억병…’이라는 코카콜라류(類)의 성공신화에 한국 기업들은 앗찔한 매혹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10년 남짓 경제 발전단계가 뒤처져 있으면서도 만성적인 공급부족에 시달리는 중국 시장의 수급구조가 국내 기업들에겐 ‘중국〓기회의 땅’이란 이미지로 다가왔다.
중국어 열풍이 불었다. 이헌조(李憲祖)LG전자 부회장(현 LG인화원 고문) 같은 이는 회사 간부들에게 “중국에 회사의 미래가 달린 만큼 중국어를 모르고는 임원될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각 그룹 연수원에 중국어 강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현지 연수 프로그램이 대폭 강화됐다. 베이징(北京)의 대표적인 어학연수기관인 ‘북경어언학원’엔 중국어를 배우려는 한국인들로 넘쳤다.
중국 투자붐이 일어난 지 올해로 6년째. 우리기업들의 대중(對中)투자는 새로운 변곡점을 맞았다.
초창기 싼 임금만 보고 연해(沿海)지역에 공장을 지었던 ‘막무가내’패턴은 내수를 파고드는 중화학부문 투자로 묵직하게 바뀌었다. 초창기는 단순가공→3국수출 전략이었으나 임금상승과 중국정부의 ‘내륙중시’정책에 힘입어 차츰 ‘현지조달―판매’의 내륙형으로 변화하고 있다.
중소기업으로 붐볐던 중국시장이 5대그룹 등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된 것은 2,3년전의 일. 오디오 전자부품 등에서 시험적으로 가능성을 타진한 대기업들은 중국 전문인력이 늘어나고 중국 당국과의 ‘관시(關係)’가 정착되면서 석유화학 자동차부품 전자 유통 등으로 업종을 확대하고 있다.까다롭기로 소문난 중국시장에서 진출 1년만에 흑자를 낸 기업들도 다수 생겨났다.
국제통화기금(IMF)한파를 맞아 우리기업들의 중국 투자열기는 다소 위축된 상태. 그러나 6·25이후 최대의 국난을 맞아 중국에서 위기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은 더욱 부산하다. 이달 5일엔 화교자본의 대중 진입로였던 광둥성 동관(東莞)시에 아남전자가 50만대 규모의 오디오공장을 준공, 변함없는 중국열기를 보여줬다.
중국은 동아시아국들의 경제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올들어 7.2%의 성장률(1∼9월)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무역수지도 3백52억달러 흑자를 낸데다 9월말 현재 외환보유고는 1천4백11억달러.
위안(元)화의 절하 가능성을 언급하는 외국투자가들보다는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진 평가절하가 없을 것’이란 전망이 훨씬 우세하다. 중국 경제가 이처럼 순항함에 따라 2년동안 감소세였던 외국인 투자도 최근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들어 9개월동안 3백58억달러(계약액 기준)를 기록, 작년 같은 기간보다 2.05% 늘어난 것.
주롱지(朱鎔基)등 중국 경제지도부는 광활한 대륙을 위 아래로 나누는 장강(양자강)을 용의 몸통으로, 장강의 끝인 상하이(上海)를 용의 머리로 부른다. 용머리가 물고있는 여의주(푸동·浦東)가 융성하면 수천년 잠들어있던 중국이란 대륙의 잠재력이 지구촌을 떨친다는 뿌리깊은 중화사상이 엿보인다.
중국 지도자들의 이같은 장기구상은 푸동지역을 국가개발구로, 장강 연안 내륙을 투자우선지역으로 지정하도록 만들었다. 연해지역의 투자우대 조치를 점차 철폐하고 내륙으로 옮겨가는 것도 이 때문. 우리기업들의 중국진출도 이제 연해중심에서 내륙으로 옮겨갈 때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