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反政) ①
1987년 우리 셋은 서른 살이 되었다. 두환도 그럴 것이다. 살아 있다면.
어느날 조국은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고 술을 마시다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나 참, 이까짓 걸 숨어서 해야 하던 시절이 있었단 말야?”
“그러게 말야. 그걸 못하게 하려고 변소까지 따라와 뒤지고 따귀를 때리던 놈들은 또 뭐냐.”
“얻어맞아가면서 기어코 또 하던 놈들은 뭐고?”
승주와 내가 번갈아 한마디씩 대꾸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술 담배 하는 고등학생에게 너그러웠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녀석을 보면 우리는 우리가 고등학생 때의 서른 살짜리가 그랬듯이 쪼그만 놈이 벌써부터, 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한편으로는 두환의 모습을 연상하기도 했다. 우리의 머릿속에 두환은 나팔바지 교련복을 요란하게 떨어대서 몽당연필을 굴러가게 만들거나, 교실 뒤쪽의 거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옆눈으로 제 모습을 슬쩍 보며 ‘짜식, 멋있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까까머리에 멈춰 있었다.
삶의 과정을 한 단계씩 거칠 때마다 우리는 두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 여름 나의 입대를 앞두고 셋이 만났을 때에도 그랬다.
갑자기 M16을 든 계엄군 둘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군인들은 테이블을 하나하나 돌더니 우리 앞에서 멈췄다. 너! 팔 걷어봐! 긴팔 셔츠를 입고 있는 조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소매폭이 좁은 조국의 셔츠는 땀으로 달라붙어 이두박근 아래에서 더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벗어! 군인 하나가 M16의 부리를 조국의 가슴에 겨눴다. 조국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 셔츠 단추를 쉽게 풀 수가 없었다. 군인이 상체를 조금 움직이자 제풀에 놀란 그는 급히 셔츠를 움켜쥐고 양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두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단추가 몇 개가 튕겨나오며 옷이 벗겨졌다. 군인들의 표정은 너무나 삼엄하여 어쩌면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조국을 향해 꽤나 시시한 놈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는 듯한 시큰둥한 눈길을 준 다음 술집을 나갔다.
조국이 여름에 긴팔 옷을 입은 것은 순전히 빨래한 옷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취생활 몇 년만에 그는 여러 가지 생활의 지혜를 터득했다. 빨래횟수 절약도 그 중 하나였다. 다섯 벌의 팬티를 사흘씩 번갈아 입고 그리고 뒤집어서 다시 사흘씩, 그런 다음 깨끗한 것을 골라서 다시 이틀씩. 그러면 한 달 정도는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최근에 빨래한 기억이 없는 조국으로서는 그날처럼 한여름에 긴팔 옷을 입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군인들이 나간 뒤에야 우리는 그들이 셔츠를 벗어보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문신을 감추려고 긴팔 옷을 입은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삼청교육대에 갈 뻔한 조국은 그날 술맛이 났다. 단추가 떨어진 옷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대취했다.
헤어지면서 우리 셋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시국에 두환이는 무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