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다.
1897년 평양 신양리에 세워진 숭실학당부터 따져서 10월 10일로 개교 1백1주년을 기록했다. 1905년에는 국내 최초로 근대식 대학교육을 시작했다.
대학이 세워진다는 소식에 평양 주민들은 일주일만에 당시 돈으로 6천원을 기탁했다. 독립협회가 1년간 5천원 가량의 활동자금을 모은 사실을 감안하면 민족대학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기대에 걸맞게 숭실대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학교 차원에서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벌였으며 3·1독립운동 때는 민족지도자 33인에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숭실대 김창준 등 6명이 참여했다.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해 1938년 폐교당하는 수난을 겪는 가운데 조만식(曺晩植) 안익태(安益泰) 양주동(梁柱東) 황순원(黃順元) 등 수많은 민족지도자와 문화계 인재를 배출했다.
숭실대는 전통에 안주하지 않는 대학, 학교 이름대로 허(虛)가 아닌 실(實)을 숭상하는 대학이기도 하다.
69년에 국내 처음으로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했고 이어 국내 유일의 중소기업대학원 노사관계대학원 통일정책대학원 정보과학대학원을 만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시대에 국가와 사회의 최우선 과제가 된 정보화 세계화 중소기업육성 통일부문에 일찌감치 눈을 돌린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96년 교육부가 주관한 교육개혁 평가에서 우수대학(세계화 정보화)에, 동아일보사의 대학정보화 평가에서 종합 1위에 올랐다.
또 올해 정보통신부가 선정한 창업센터 10개 지원대학에 서울대 고려대 경희대 경북대와 함께 포함됐다.
‘최초에서 최고로’를 슬로건으로 21세기를 향해 발빠르게 움직이는 숭실대가 새삼스레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보화 선도〓전자계산학과에 이어 국내 처음으로 인공지능학과 소프트웨어공학과(92년) 방송통신공학과(98년)를 설치했다.
정보통신전자공학부 컴퓨터학부 전기공학과 정보통계학과 정보사회학과 등 정보통신 분야 입학정원은 1천명 이상으로 국내 대학중 가장 많다.
이 분야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은 1천여명에 이른다.
숭실대는 더 나아가 재학생은 물론 일반인이 미래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가상대학’을 추진중이다.
화상회의 시스템과 멀티미디어 교육시스템을 이용해 전국 어디서나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
▼국제화 교육〓미국을 비롯한 10개국 31개 대학과 교환학생 프로그램 협약을 갖고 30여명을 한 학기 또는 1년간 교환학생으로 보낸다.
또 토플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외국에서도 학점을 받는 제도를 도입해 미국 위트워스대, 캐나다 빅토리아대와 공동운영중인데 현재 25명이 공부하고 있다.
이밖에도 해마다 5백여명의 학생이 자매대학에서 단기 어학코스를 밟고 돌아온다.
96년부터는 어학교육을 회화 중심으로 바꿔 교내 어학원 실습시간을 주당 3시간으로 하고 1학기 1학점씩 모두 2학점을 필수로 배우도록 했다.
▼창업지원〓특수대학원인 중소기업대학원, 학부과정인 중소기업학과를 국내 처음으로 설치한 데 이어 4월 벤처기업 및 대학내 관련 연구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창업지원연구센터를 만들었다.
연구센터는 2백5평 규모로 15개 입주업체에 2년간 창업아이템과 기술자문, 신기술 개발과 국내외 판매정보 제공, 홍보업무 대행 등의 도움을 줄 예정.
컴퓨터 프린터 복사기 팩시밀리와 사무집기는 무료.
5월에는 중소기업청과 함께 ‘벤처창업로드쇼’를 열고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창업아이템 경연대회, 벤처창업 간담회, 산학연(産學硏)협력프로그램 협의행사를 가졌다.
▼봉사활동〓IMF 충격으로 대학생의 어학연수와 배낭여행이 크게 줄었지만 여름방학 기간인 8월 중순 중국 옌볜(延邊)에서 조선족 돕기 활동을 벌였다. 해마다 세계화와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실시하던 테마여행이다.
분단의 아픔과 민족공동체 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발해사를 전공한 교수가 학생 25명과 함께 옌볜 두레마을과 백두산, 북한과 가까운 국경지역을 방문했다.
이에 앞서 6,7월엔 네팔 카트만두와 필리핀 두마게테 지역을 찾아가 교포자녀에게 공부를 가르치거나 무주택자를 위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참여했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