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년 전 이맘 때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조건협상을 하면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로 4.5∼5%를 내놓았다. IMF는 2.5%를 냈다. 결국 3%로 합의했지만 며칠간 2.5%와 3%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벌였다.
정부와 IMF는 이 전망치를 4번이나 수정했다. 1월엔 1∼2%로, 2월엔 1%로, 5월엔 -1%로, 7월엔 -4%로.
결과는 어떤가. 9월까지 -5.9%로 나왔다. 53년 경제성장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래 최악이다. 예측은 허망하게 빗나갔다. 1년 전의 줄다리기가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성장률뿐만이 아니다. 1년 전 정부와 IMF가 43억달러 적자로 전망한 올해 경상수지는 9월까지 3백11억달러 흑자다. 1년 전 ‘균형 또는 소폭흑자’로 잡았던 올해 재정은 21조원의 적자로 뒤집혔다. 그토록 터무니없이 틀리는 전망이라면 차라리 내놓지 않는 게 낫다.
정부산하의 대표적 경제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수년간 경제예측을 했던 사람이 그곳을 떠난 뒤에 사석에서 털어놓은 말이 생각난다. “오랫동안 국민에게 사기를 많이 쳤지요.”
강봉균 청와대경제수석은 그저께 “경제지표가 올 4·4분기를 기점으로 좋아져 내년 성장률은 2∼3%로 회복되고 2000년에는 4∼5% 수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정경제부는 IMF체제 1년을 평가하면서 “경제위기를 경험한 나라들이 대체로 2∼3년간 마이너스성장을 겪었다는 점에서 우리 경제의 회복속도는 상당히 빠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가 하루빨리 좋아지기를 갈망하는 국민에게 그나마 희망을 심는 얘기들이다.
경기가 언제쯤 풀릴지, 오늘 이후의 경제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를 관측하는 일은 중요하다. 기업도 가계도 이를 바탕으로 내일을 설계한다.
그러나 숫자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강경식전부총리는 작년 경제현장에 위기신호가 들어온 뒤에도 “펀더멘털(기초지표)이 좋은데 무슨 외환위기냐”고 입버릇처럼 말하다가 결국 이 나라를 ‘IMF병원’에 입원시키고 말았다. 그는 당시의 성장률 추이 같은 몇가지 거시지표에 큰 문제가 없다는 펀더멘털의 미신에 사로잡혀 외채를 갚을 달러가 고갈되는 상황을 외면했다. 그의 뒤를 이은 임창열경제팀도 IMF와 구제금융 협상을 벌이면서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되뇌다가 비웃음만 샀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섣부른 전망을 남발하기 보다 지금의 상황을 좀더 면밀하게 점검하는 노력이 앞서야 한다. 금융기관 부실채권과 기업들의 국내외 부채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위기상황의 완전해소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부실채권 규모에 대해 정부는 71조원이라고, 일부 민간기관은 1백90조∼2백조원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경제가 살 길은 대외신인도 회복과 기업 및 금융의 경쟁력 효율성 제고로 요약된다. 그런데 외국의 신용평가기관이나 투자자들은 정부가 강조하는 펀더멘털 숫자만 보고 신용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금융과 기업의 투명도는 높아지는지, 미시적 산업구조는 개선되는지 등을 더 중시한다. 정부 기업 금융기관 할 것 없이 외형(덩치)의 미신에 빠져 있다가 IMF사태를 맞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인준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