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사건 1차 수사가 이미 마무리된 97년 3월 초.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 8층의 검찰총장 집무실에 김기수(金起秀)총장과 최명선(崔明善)대검차장 최병국(崔炳國)중수부장이 마주앉았다.
“최부장, 이미 결론이 났소. 인천지검장으로 전보발령이 났으니 내일부터 거기로 출근하시오.”
밤새 잠을 못 이룬 탓인지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최중수부장에게 경질사실을 통보하는 김총장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흘렀다.
“총장님. 명대로 하겠습니다. 조금도 괘념치 마십시오.”
최중수부장과 김총장을 묵묵히 지켜보던 최차장의 눈에도 눈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검찰수뇌부 3인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던 대검중수부장 경질은 이른바 ‘4인모임’에서 결정됐다.
10여일 전 개각으로 고건(高建)총리내각이 들어서면서 고총리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 최상엽(崔相曄)법무장관 문종수(文鍾洙)대통령민정수석 등 4인모임이 만들어진 것. 한보사건을 수수방관하고 있던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대책모임이 구성된 셈이었다.
4인모임은 한보사건 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검찰 수뇌부의 교체를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이른바 부산 경남(PK)출신 검찰 수뇌부가 진두지휘한 한보사건 1차 수사가 정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는 것이 모임의 결론이었다.
고총리와 최장관이 적극적이었고 권부장은 대체로 침묵을 지키는 쪽이었다. 문수석만 ‘수사도중 검찰수뇌부 교체’에 반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김영삼대통령이 총장의 임기중 교체에 반대함으로써 중수부장의 경질이라는 고육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