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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88]벼랑에 몰린 민주계

입력 | 1998-11-30 19:30:00


노동법 파동으로 정국이 파란을 거듭하고 있던 97년 초 들이닥친 ‘한보태풍’은 문민정권 탄생의 주역인 민주계에 치명타를 가했다.

민주계 핵심인사인 홍인길(洪仁吉) 황병태(黃秉泰)의원과 김우석(金佑錫)건설교통부장관이 구속됐다. 민주계 중진들도 한보에서 돈을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여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는 곤욕을 치렀다.

한보태풍이 휘몰아치던 4월 중순경 서울 여의도 신한국당 중앙당사 근처에 있는 성우빌딩 406호에 비밀사무실이 차려졌다. 열평 남짓한 크기의 이 사무실에는 몇몇 민주계 인사들이 수시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원래 이 사무실의 주인은 민주계 핵심인 김무성(金武星)의원. 하지만 이 때부터는 ‘서석재(徐錫宰)―김무성팀’이 민주계의 정권 재창출을 목표로 범계파 통합조직의 밑그림을 그려내는 비밀작업실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얼마 전부터 계파통합 문제를 깊숙이 상의해왔다.

김무성의원 뿐만 아니라 역시 청와대 민정비서관 출신인 김길환(金佶煥)의원, 김영백(金榮百)신한국당 부대변인, 최형우(崔炯佑)의원의 특보 출신인 안경률(安炅律)씨 등이 합류해 실무준비팀이 극비리에 갖춰졌다. 조직경험이 많은 민주계 핵심당료들과 몇몇 의원보좌관들도 실무지원팀으로 동원됐다.

실무지원팀에 참여했던 C씨의 설명.

“나중에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로 구체화됐지만 범민주계 통합조직의 체계와 인적구성 등 실무적인 모든 문제가 이 곳에서 깊숙이 검토됐다. 논의된 내용은 모두 보고서로 작성됐고 김무성의원이 이를 모아 서석재의원에게 직접 보고하는 식으로 비밀리에 작업이 진행됐다. 당시 실무팀에 참여한 사람 이외에는 사무실의 존재 자체도 모를 정도로 보안유지에 신경을 썼다. 조직 자체가 특정 계파의 색채를 띠어서는 안되며 따라서 민주계외에 당내 중도파나 민정계 중진들도 끌어들여야 한다는 구상도 이 비밀작업팀의 아이디어였다. 세를 확산하기 위해 당내 초선의원 그룹인 ‘시월회’를 끌어들이는 문제 등 모든 세부적인 계획과 일정이 치밀하게 짜여졌다. 지역별 책임자까지 내부적으로 선정하는 등 신당 창당을 방불케 하는 방대한 작업이 착착 진행됐다. 다만 민주계의 대권후보가 누구냐를 결정하는 문제는 논외였다.”

새 사무실을 마련하는 일을 포함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도 논의됐으나 서의원과 김무성의원 사이에 이견이 노출됐다.

김무성의원의 증언.

“한창 정발협 발족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데 민주계 중진들끼리 1천만원씩 돈을 모은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래서 서의원을 만나 ‘형님, 정권을 잡겠다면서 1천만원이 뭡니까. 제가 10억원을 내겠으니 형님이 30억원만 만드십시오. 40억원을 만들어 1억원씩만 돌리면 국회의원 30∼40명을 규합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자는대로만 하면 형님이 확실한 좌장역할을 하면서 신한국당 경선은 물론 정권 재창출을 향한 승부수를 띄울 수 있습니다’라고 강력히 건의했다. 그런데 결국 서의원이 그걸 하지 못했다.”

김의원은 이때부터 조금씩 정발협 조직작업에서 발을 뺐다. 아무래도 대권 창출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성우빌딩의 비밀작업팀은 5월7일 정발협이 역시 신한국당사 부근의 미주빌딩 5층에 새 사무실을 마련해 공식출범하면서 소멸됐다. 불과 2주일에 걸친 작업이었다. 물론 자신들이 미리 짜놓은 밑그림을 새 팀에 넘기며 ‘발전적 해체’를 약속했지만 성우빌딩 비밀작업팀의 행로는 그 즈음 민주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징후였다.

한보태풍과 ‘김현철(金賢哲)청문회’가 급류를 타면서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민주계는 이미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1월26일 저녁. 일본 벳푸(別府)에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김대통령의 머리는 복잡하기만 했다.

“각하, 한보 부도의 파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시중에는 한보가 92년 대선 때 수백억원의 대선자금을 제공했다느니, 현철씨가 한보 거액대출의 배후에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퍼져있습니다.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는 민심을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청와대에 도착한 직후 김광일(金光一)비서실장이 한보 부도와 관련해 시중에 떠도는 온갖 풍설을 가감없이 보고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취임 후 단 한 푼도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약속을 철석같이 지켜왔는데….”

김대통령은 이미 일본에 머무는 동안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총재의 ‘김대통령도 조사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있었다.

김대통령의 ‘상처입은 자존심’은 결국 정면돌파로 이어졌다. 자신과 현철씨를 겨냥한 의혹들이 정치성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는 점을 검찰수사를 통해 분명하게 밝히겠다는 것이었다.

현철씨의 ‘결백항변’도 김대통령의 자신감을 부추겼다.

“아버님, 이번에도 야당에서 한보의 배후인물로 저를 지목하고 나오는데 정말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순전히 저와 아버님에 대한 정치적 공격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보와는 금전관계는 물론 한보의 어느 누구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김광일실장이 민심수습을 강조하던 1월26일 가족예배 참석차 청와대에 들어간 현철씨는 거듭 한보와의 무관함을 주장했다.

1월27일 최병국(崔炳國)대검중수부장은 한보사건에 대한 수사착수를 공식발표했고 정태수(鄭泰守)총회장 등 35명의 출국을 금지하는 것을 시발로 수사는 진행됐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될수록 사태는 ‘임기말 권력누수를 막고 정국을 주도해나가겠다’는 김대통령의 의도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면돌파라는 칼은 부메랑이 돼 민주계의 심장부를 파고 들었다.

홍인길 황병태의원과 김우석장관의 구속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가 흘러나오면서 민주계는 혼란을 넘어 자중지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급기야 민주계 중진이자 대권도전 채비를 하고 있던 김덕룡(金德龍)의원까지 리스트에 올랐다.

김의원과 가까운 민주계 인사 K씨의 설명.

“김의원 진영은 청와대와 안기부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던 현철씨측이 한보사건을 대권창출 시나리오의 일환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봤다. 당시 현철씨는 이홍구(李洪九)대표를 대권후보로 밀었는데 노동관계법 날치기처리로 이대표의 인기가 급락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러자 김의원쪽은 현철씨측이 한보사건을 기화로 ‘이대표 대권카드’를 관철시키는데 장애가 되는 당내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정태수 리스트를 유출시킨 것으로 강하게 의심했다.”

2월초부터 최형우 김덕룡 서석재 강삼재(姜三載)의원 등 내로라하는 민주계 핵심들의 회합이 잦아졌다.

당시 민주계 모임에 여러차례 참석했던 K의원의 증언.

“민주계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대체로 특정세력에 의한 민주계 죽이기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민주계 내에서조차 서로 의심하면서 자중지란에 빠졌기 때문에 집단적인 대응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내 편인지, 적인지 분간할 수 없는 판에 무슨 깊은 얘기를 나누고 상의를 하겠는가. 몇몇 인사들은 김대통령이 현철씨를 살리기 위해 민주계를 다 죽이려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3월18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민주계 중진 13인 회동이 소집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 속에서였다.

참석자는 김수한(金守漢)국회의장을 비롯해 김덕룡 서석재 김명윤(金命潤) 황낙주(黃珞周) 신상우(辛相佑) 김정수(金正秀) 서청원(徐淸源)의원 등 민주계의 3선 이상 의원 13명.

민주계 중진들이 한꺼번에 공식 회동한 것은 90년 3당 합당 이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1주일 전 민주계의 좌장 역할을 해온 최형우의원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위기의식은 극도로 고조돼 있었다.

더구나 김대통령은 3월13일 신한국당 전국위원회에서 이회창(李會昌)씨를 신한국당 대표로 지명해 민주계는 당권에서도 배제된 상황이었다.

이날 모임의 간사로 선출된 서석재의원은 “오늘 이 모임을 계기로 민주계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뭉쳐서 한 목소리를 내게 될 것”이라고 모처럼 민주계의 결속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른바 김심(金心·김대통령의 의중)은 방관자적 자세로 일관했다. 13인 모임이 정발협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위기에 몰린 채 김심마저 붙잡지 못한 민주계의 앞길은 점점 험난해지기 시작했다.

〈김창혁·김정훈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