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선거 정당제도 등 정치개혁을 내년으로 미루자 시민단체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정치개혁 화두(話頭)를 꺼낸지가 언제인데 해를 넘기느냐, 결국 정치개혁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는 문제나 지구당 중앙당을 감축하는 문제, 돈 덜 쓰는 선거제도를 정착시키는 문제 등 국민이 바라는 정치개혁의 법제화가 그렇게도 어려운가라는 개탄도 적지 않다. 당연한 비판이자 지적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정치개혁의 내년 연기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본다. 정치의 기본 틀인 권력구조문제, 즉 대통령제냐 내각제냐가 유동적인 상황에서 선거제도나 정당제도를 고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뱃속의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고 돌잔치에 쓸 옷부터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행 대통령제를 유지하든가, 공동여당의 약속대로 내각제 개헌을 하든가 둘 중 하나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서 선거제도 등을 고치려 든다면 이는 국민 앞에 ‘개혁 쇼’를 벌이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권력구조문제의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그에 맞춘 정치개혁이 속도를 얻게 된다. 그런데 지금 사정은 어떤가.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물론 야당인 한나라당도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있다. 대체로 국민회의는 현행 제도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임기를 채웠으면 하는 입장인 것 같고 자민련은 약속대로 내각제로 가자고 조르고 있다. 한나라당은 대통령제 유지가 당론이지만 실제로는 두 여당의 결정을 지켜본 뒤 당시 상황에 따라 대처할 듯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인다. 이런 모습은 내년 후반기까지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지금 우리 상황이 권력구조형태를 놓고 한없이 입씨름만 벌일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데 있다. 권력구조 변경논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게 시급하다는 것이다. 자민련 스스로도 인정하듯 ‘내각제 개헌이 공동여당의 약속이지만 우선은 경제회복이 급선무’라는 얘기다. 정당들이 경쟁하듯 경제회복 방안을 내놓고 그의 실현에 당력을 쏟아도 아쉬운 때에 웬 개헌논쟁이냐고 비판하는 시각이 엄존한다. 권력구조 논의를 뒤로 미루자는 주장은 그런 바탕을 깔고 있다.
이렇게 보면 권력구조 변경의 문제는 빨리 매듭을 짓든지 아니면 아예 뒤로 미루든지 하는 시기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느니, 약속 이후에 상황변동(한국의 IMF체제 진입)이 있었으므로 재조정해야 한다느니 하는 논쟁들도 이같은 시기선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논쟁의 본체인 권력구조 형태변경은 궁극적으로 국민이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 논쟁을 촉발케한 두 당사자, 김대중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총리가 요점을 확실히 정리해 국민 앞에 제시해야할 책무가 있다. 그러지는 않고 대리인들을 통해 군불 때는 형식으로 내각제로 가자,가지말자 입씨름만 벌이니 개혁의 요체인 정치개혁이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정리할 것을 바란다.
민병욱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