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걷는 거리.’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에서 영동대교 남단까지 3.2㎞에 걸쳐 동서로 곧게 뻗은 도산대로. 6월이면 태양은 이 거리와 나란히 지나간다. 아침저녁이면 수십m 길이의 사람 그림자가 차선과 거의 평행선을 긋는 곳. 30년째 도산대로를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정진우감독은 “사람과 그림자의 움직임이 역동적인 춤사위를 만드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장면을 찍기 좋은 곳”이라고 소개.
▼ 걷기&몰기 ▼
도산대로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20대 중반이하의 ‘걷기족’과 자가용을 이용하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몰기족’의 공간으로 나뉜다. 걸어다니는 쪽은 데이트족이 대부분. 몰고다니는 쪽은 데이트족을 비롯해 조용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찾아 다니는 연예인 예술인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다.
서울지하철 3호선 신사역을 중심으로 브로드웨이 그랑프리 시네마천국 등 극장과 카페 패스트푸드점은 걷기족의 무대. 일부는 신사역→씨네하우스 셔틀버스를 타고 도산공원쪽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산공원쪽은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하고 넓은 지역에 걸쳐 띄엄 띄엄 카페 음식점 등이 분포하고 있어 차 없이 다니기 불편한 지역. 따라서 전형적인 ‘몰기족’의 공간. 이 부근의 커피 한 잔 값은 5천원, 신사동사거리쪽은 3천원선.
▼ 커피값의 차이 ▼
널찍한 판유리, 이국적 인테리어와 외관, 넉넉한 주차공간을 갖춘 도산공원 부근의 카페들. 이들이 파는 것은 ‘커피’가 아니다.
카페 ‘플라스틱’을 운영하는 조은숙씨. “이곳에 한국적인 것은 없다.간판도 외국어 일색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서 묘한 향수(鄕愁)에 젖고 분위기에 취한다. 그것 때문에 돈을 지불한다.”
해외유학파 전문직과 해외연수파 직장인들. 외국에서는 한국이 그리웠지만 지금은 가끔 외국이 그리운 사람들. 북적거리는 분위기를 피해 철저하게 ‘나’의 존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잠시동안의 여유를 찾는 사람들. 여기서는 옆자리에 탤런트 김희선이 앉아 있어도 아는 척 하지 않는다.
카페 ‘아일’의 전수현씨. “지나가다 한 번 들르는 고객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단골손님이다. 하지만 단골도 주인이 친한 척하면 바로 발길을 끊는다. 손님들은 남을 알려 하지 않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가벼운 눈인사가 단골에 대한 예우의 전부다.”
김희영씨(28·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영화 한 편을 본 뒤 머리를 텅 비우고 간섭받지 않고 몇시간이고 바깥풍경을 바라보고 싶을 때 발걸음이 이 곳을 향한다.”
▼ 수입차와 칼국수 ▼
84년 씨네하우스가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20여개의 극장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충무로’로 자리매김한 도산대로. 부유층이 사는 강남지역의 중심도로로 국내 수입차 전시장이 거의 모두 모여 있으며 손톱미용실과 자동차광택전문업소가 호황을 누리는 거리. 이 곳에 일부 섞여있던 ‘중간층’이 요즘들어 사라지고 있다. 골동품점 아소보이의 원경희과장.
“도산공원쪽에는 대형승용차와 외제차는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는 반면 소형차는 크게 줄고 있다.”몸을 착 감는 짙은색 고급정장에 익숙하며 나의 존재가 노출되는 심플한 인테리어의 카페를 찾으면서도 간섭받기는 싫어하는 ‘코쿤+댄디족’ 문화색이 짙어지는 도산공원쪽. 영화 한 편과 햄버거 칼국수의 소박함이 깊이를 더해가는 또다른 분위기의 신사동사거리쪽. IMF한파와 함께 두 지역의 문화는 서로 다른 길을 달리는듯하다.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