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적 ①
중국의 옛 붕우지도(朋友之道)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친구간에는 돈을 융통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친구간에는 서로 선을 권하고 잘못을 나무라야 한다.
둘째 항목이야 당연하고도 싱거운 말이다. 문제는 첫째 항목인데, 거슬리기는 하지만 맞는 면이 없지 않다. 인간관계란 애증이 섞여야만 깊어진다. 못보다는 나사가 벽면과의 공유면적이 더욱 많아 훨씬 더 단단히 박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아프게 할수록 관계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또 사람의 관계에서 돈 관계만큼 애증의 진폭을 많이 가진 것도 없다. 그러니 친구 사이에 돈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말이 이상한 말만은 아니다.
내가 돈을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않는 이유 역시 그 맥락이다. 나는 누구하고도 깊은 관계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물론 그럴 만한 돈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같은 사람이 돈을 떼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만약 일어났다면 그것은 드렁칡 따위의 악연말고는 무엇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두환이 떠난 다음주에 나는 사표를 냈다. 서랍 속에 사표를 써서 넣어둔 지는 거의 1년이 넘은 일이다. 그날따라 국장이 잔소리를 하면서 손바닥으로 내 책상 위를 연거푸 쳐대는데 용케 사표가 들어 있는 서랍 위쪽만 치는 것이었다. 빨리 그 안의 물건을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몸짓 같았다. 나는 조용히 서랍을 열어 사표를 꺼내주었다.
그 회사에서 마지막 받은 전화가 ‘스튜디오 파인더’의 이사 조국의 전화였다. 잡지를 창간해야 하니 두 시간 안에 ‘도서출판 청석골’의 이사로 와달라는 용건이었다. ‘송악 기획’의 이사 겸 ‘평산 인터테인먼트’의 이사인 승주가 전화를 바꿔 받더니 다소 거들먹거리며 덧붙였다.
“브라질 교포 사업가를 하나 잡았거든. 우리가 하는 브라질 쇼에도 돈을 다 대고, 또 회보를 하나 내겠대. 그 일을 너한테 좀 맡기려고.”
“무슨 사업 하는 교포래?”
“자동차 수입도 하고 경영 컨설팅도 하고 그런다는데 어쨌든 교민사회에서는 꽤 거물이라지 아마?”
내 짐작에는 브로커일 것 같았다. 교포 사업가 중에는 국내에 인맥을 만들고, 또 자신이 고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란 걸 교민사회에 홍보하기 위해서 매체를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언젠가 아르바이트 삼아 ‘월간 코리아 해피 타임즈 창간호’라고 거창한 제호를 단 16페이지짜리 회보를 만들어준 적이 있다. 무슨무슨 매체의 발행인이라는 직함이 위세를 갖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말해줘도 잘 안 믿지만, 똑같은 말이 신문기사로 실리면 무조건 믿어버리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교민사회처럼 본국에서 뭘 해먹다 온 놈인지 서로 수상해 하는 곳에서는 공신력으로 가장한 매체의 힘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국과 승주에게 걸려들 정도면 프로급은 아니었다. 나는 조국이나 승주 같은 이류들과 한통속이 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더구나 이류에게 걸려든 삼류를 등쳐먹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자존심이 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