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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이인길/재벌이 「반성문」쓴 후

입력 | 1998-12-09 19:22:00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정말 대단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재벌을 요리하는 솜씨 하나만은 그저 입이 딱 벌어진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재벌을 그렇게 다루진 못했다. 집권하는 사람마다 손을 보는 시늉은 했지만 다들 제풀에 꺾였다. 어떤 분은 총수 수십명을 법정에 세우고도 재벌의 손가락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음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역대 정권의 재벌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시작 자체가 정치논리에서 비롯했고 대통령 자신에게 변화를 이끌 의지도 철학도 없었던 점이 가장 먼저 지적된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금의 재벌개혁은 이 점에서 분명히 과거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우선 대통령의 단호한 개혁의지가 그렇다.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완성된 5대 재벌의 구조개혁안만 해도 대통령이 직접 앞장서지 않았다면 솔직히 가능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개혁안의 내용은 직업관료들이 입안했을지 몰라도 총수를 굴복시킨 배경엔 대통령의 개혁적 성향과 노련한 계산, 그리고 그의 정치적 완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 시사만평처럼 영화 ‘빅딜’의 주연 감독 각본 작품상을 혼자 휩쓸만큼 그 역할은 지대했다.

여기까지는 대단히 성공적이다. 그러나 경제에는 우연이 없고 절대로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번 개혁안에서 정부는 기업이 꼼짝못할 만큼 엄청난 내용을 담았지만 원초적으로 정치논리에서 출발했다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다. 시장이 실패하면 정부주도는 당연하다는 주장도 물론 일리는 있다. 그러나 관료가 경제운용의 중심에 서고, 관료가 경제자원을 통제하는 비중이 높을수록 경제가 쇠퇴한다는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똑바로 쳐다볼 필요가 있다.

통치가 경영을 압도하고, 정치가 기업의 생사를 좌우하는 곳에서 제대로 된 기업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재벌의 악습과 폐해를 퇴출시키는 작업이 더없이 긴요하다고 해서 정부가 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재벌총수가 대통령앞에서 벌을 쓰듯 ‘반성문’을 읽어내려 가는 것을 보고 박수를치며후련해하는 사람도 물론 적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재벌하면 차입경영을 연상하고 차입경영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됐다.

경영에서 수익성을 따져 봐야 하는 것은 백번 지당하다. 그러나 모든 사업이 수익성만을 따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경영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선 기업가는늘새로운선택에 직면하고 여기엔 필연적으로 모험이 따를수밖에 없다. 모험엔 돈이 필요하다. 차입경영을 하지 말라는 것은 기업가에게 모험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남의 빚으로 투기를 하고 전문성과 거리가 먼 문어발 경영을 하는 것은 당연히 차단해야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기업가의 이런 모험의식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관료가 아니며 사업을 모르는 관료가 하려야 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바로 돈을 빌려주는 금융기관이다. 은행이 제자리를 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정부의 복안대로 은행대출금이 출자로 전환되면 은행의 책무는 그야말로 막중해진다.

지금처럼 정부가 행장부터 금리까지 좌지우지하는 ‘신관치금융’,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풍토에선 재벌개혁은 고사하고 우리의 미래까지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재벌의 경제력집중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금융개혁법과 각종 규제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권유한다.

이인길kung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