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던 97년 10월22일 오전10시. 서울 여의도 신한국당 당사 3층 기자실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20여일 전 신한국당 총재로 선출된 이회창(李會昌)총재가 긴급 기자회견을 예고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전날 김태정(金泰政)검찰총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이총재측이 폭로한 ‘김대중(金大中) 비자금파일’에 대한 수사유보 방침을 전격 선언, 정국은 바야흐로 태풍 전야의 형국이었다.
이총재가 발표단상 앞에 서자 이한동(李漢東)대표, 서정화(徐廷和)전당대회의장, 이해구(李海龜)정책위의장, 신경식(辛卿植)총재비서실장 등 당직자들이 배석했다.
이총재의 표정은 차가운 금속테 안경 때문에 더욱 싸늘하게 굳어보였다.
“정치인의 비자금 축재 수사는 진실과 법치의 원칙에 따라 성역없이 진행돼야 합니다.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마당에 이제 비자금 축재 수사는 여야가 따로 없고 성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와 신한국당은 당장 이번 대선에서부터 돈정치 돈선거를 뿌리뽑겠습니다. 그리고 나와 우리 당은 그동안 집권여당이 누려온 권력의 기득권도 과감히 포기하겠습니다. 야당과 똑같은 입장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이를 위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당적을 떠나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번 선거를 관리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한마디로 김대통령을 향해 “나가달라”고 통보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92년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김영삼대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을 떠나던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셈이었다.
김대통령이 97년 3월 이회창전총리를 신한국당 대표위원에 기용하면서 다시 이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악연(惡緣)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총재가 기자회견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선거관리’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김대통령을 향한 그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이총재의 긴급 기자회견문 초안에 담긴 내용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이총재측이 회견문 초안으로 생각했다는 문건의 내용은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김영삼명예총재의 탈당을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고 증언했다.
문제의 초안은 이총재의 사조직에 관여하고 있던 한 인사가 작성해 건네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초안은 이총재가 기자회견 전날인 21일 밤 이홍구(李洪九) 권익현(權翊鉉)고문 등 일부 당원로들과 상의하는 과정에서 폐기됐다. 실제로 사용된 기자회견문은 이총재의 정치특보를 지낸 강재섭(姜在涉)의원이 만든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총재의 ‘김영삼 탈당요구’를 보면서 정치무상이라는 단어를 되뇌었지만 누구보다 이 말을 절감한 사람이 있었다.
이총재의 부친 홍규(弘圭)옹과 해방 직후 함께 검사생활을 한 김윤도(金允燾)변호사의 무상감(無常感)은 특별했다.
김변호사의 술회.
“내가 이회창씨 부친과 같은 방에서 검사생활을 하긴 했지만 이회창이라는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대통령이 이회창씨를 문민정부 초대내각의 감사원장으로 발탁하는 데도 반대했습니다. 감사원장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대법원장으로 지명하겠다고 해 내가 또 반대했습니다. 김대통령에게 ‘이회창이라는 사람은 대법관 때 국가보안법에 반대, 소수의견을 낸 사람이다. 그런 사람한테 대법원장을 맡기면 국가보안법이 모두 무효가 될 것 아니냐’고 했더니 김대통령도 깜짝 놀라더군요.”
그러나 김변호사는 97년 1월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당시 신한국당 고문이었던 이회창씨를 만난 이후 적극적인 ‘이회창 지지자’로 변했다. 김대통령의 지근(至近)거리에서 이총재를 엄호하며 대선 막바지까지 두 사람의 ‘관계정상화’에 매달렸다.
김변호사는 “선배님, 좀 도와주십시오”라며 찾아온 이총재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이회창씨한테 두가지를 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첫째는 이회창씨의 총리시절 관변단체 예산지원 중단조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최형우(崔炯佑)내무장관한테 들으니 자유총연맹같은 관변단체 예산을 없애라고 했다는데 왜 그렇게 했느냐. 관변단체라는 게 다 여당에 힘이 되는 단체들인데 이회창씨 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둘째는 이회창씨가 대법관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해 소수의견을 제출한 일이었습니다. 이회창씨가 ‘판사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정말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믿어달라’고 합디다.”
일종의 ‘사상검증’을 한 셈이다.
이홍구대표가 노동법 날치기 파동으로 중도하차하고 한보와 김현철(金賢哲)사태 수습을 위해 김대통령이 새 대표 인선에 고심하고 있던 3월 초 이회창고문은 다시 김변호사를 찾았다.
말이 ‘고심(苦心)’이었지 김대통령은 이때 이한동고문을 신임 대표로 결심해놓고 있었다.
이회창고문은 김변호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한동고문이 당대표가 되면 탈당하겠다는 얘기였다. 대통령후보 경선주자가 대표가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대통령에게 전하라는 얘기로 받아들인 김변호사는 급히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는 “이회창씨는 김대통령이 감사원장에 발탁해 국무총리까지 시킨 사람 아니냐. 당대표자리를 안주면 탈당하겠다고 한다”고 김대통령에게 전했다.
사실 이회창고문측은 김변호사만을 통해 김대통령에게 ‘탈당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이회창 7인방’의 핵심으로 활약한 서상목(徐相穆)의원은 여러 채널을 통해 “탈당하면 우리만 탈당할 줄 아느냐. 허주(虛舟·김윤환·金潤煥의원의 아호)와 우리는 패키지(한묶음)다”라며 압박했다.
이한동고문은 나름대로 ‘당대표가 되려면 경선후보 포기선언을 해야 한다’는 청와대 주문에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또 한보사태와 현철씨 문제로 정권마저 흔들리자 김대통령은 이회창고문의 ‘대쪽 이미지’가 시국수습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결국 이회창고문에게 당대표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필요에 의한 일시적 화해였을 뿐이었다. 김대통령과 이대표는 이후 김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할 때까지 크고 작은 고비마다 충돌했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감사원장에 발탁된 데 이어 총리로 기용됐다 김대통령과의 갈등 때문에 사퇴할 때까지의 시기는 ‘김영삼―이회창 인연’의 기승전결(起承轉結) 중 ‘기(起)’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김대통령이 95년 6·27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전총리를 신한국당에 영입해 선거대책위원장에 기용한 것이 ‘승(承)’에 해당한다면 신한국당 대표기용은 ‘전(轉)’의 시작에 해당하는 셈이다.
후보로 선출된 직후부터 터져나온 장남의 병역기피 파문으로 여론 지지율이 급전직락, 판세가 2강(김대중 이인제후보) 1약(이회창후보)의 양상으로 발전하면서 김대통령과 이후보의 인연도 ‘결(結)’의 단계로 옮겨갔다.
김심(金心·김대통령의 의중)도 ‘이회창 포기’쪽으로 급격히 기울어갔다. 이후보의 지지율이 좀처럼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김대통령은 청와대를 찾아온 김변호사에게 역정을 냈다.
“김변호사는 이회창 아들문제도 모르고 이게 뭐요.”
이후보 장남의 병역기피문제도 알아보지 않고 이대표에게 후보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느냐는 짜증이었다.
김대통령은 결국 이총재가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나가달라”고 요구한 데 이어 청와대가 이인제(李仁濟)후보의 국민신당에 2백억원을 지원했다는 ‘신당지원설’까지 제기하고 나서자 11월7일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어느 후보가 당선돼도 좋다. 공명정대한 선거를 통해 국민이 선택한 후보를 적극 지지하겠다.”
김대통령은 탈당 직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이같은 말로 5년 가까이 계속돼온 이회창총재와의 인연을 끝내고 말았다.
〈김창혁기자〉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