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그룹간 빅딜이 막판 조정과정에서 지나치게 정치 및 상황논리에 치우쳐 경쟁력 강화라는 당초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연초부터 소리높여 고통분담을 외쳐왔지만 정작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에 밀려 시한에 쫓기듯 미봉하는 형태로 빅딜이 변질되는 양상이다.
삼성자동차―대우전자 빅딜의 경우 경쟁력 강화를 가늠할 인력 및 설비조정 문제가 채 실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리원칙이 결정되는가 하면 반도체 경영주체를 선정할 실사기관은 ‘연내 선정’이라는 일정에 쫓겨 무리한 평가를 강행, 후일 심각한 부작용을 예고하고 있다.
▼혼미에 빠진 ‘슈퍼빅딜’〓정부가 그동안 재계에 줄기차게 요구해온 ‘핵심사업 위주의 사업구조조정’은 그룹내 동원 가능한 경영자원을 주력업종에 집중,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목표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비슷한 업종의 다른 그룹 계열사를 인수할 경우 간접부문 인력과 중복설비 조정은 규모의 경제를 도모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
대우와 삼성이 16일 각각 발표한 빅딜 후속대책은 △삼성자동차 인력에 대한 고용승계 △인수후에도 상당기간 설비 정상가동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인수대상 기업의 브랜드와 기존 협력관계를 수년간 유지하면서 어떻게 기존 사업분야와 화학적 융합이 가능하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재벌개혁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부와 재계가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대우와 삼성간 ‘슈퍼빅딜’은 자칫 소유권만을 맞바꾸는 ‘총수간 거래’로 끝날 공산이 커졌다.
▼시간에 쫓길수록 후유증만 커진다〓삼성과 대우간 빅딜이 이처럼 경제논리를 무시한 채 진행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해당업체 근로자들과 지역민심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논리 탓.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설익은’상태에서 빅딜구상이 공개된 탓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거래조건 등이 전혀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에 쫓기듯 빅딜사실이 공개되면서 두 회사 영업 및 생산망은 이미 붕괴조짐이 일고 있다. 대우전자 현지법인은 경쟁업체의 현지딜러들이 ‘대우전자가 폐쇄된다’는 등의 악소문을 퍼뜨리면서 시장잠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용산전자상가 등의 대우전자 매장에서도 매출이 급락하고 있으며 삼성자동차의 손실액도 1천억원대에 이른다는 게 자체분석이다.
존 도즈워스 국제통화기금(IMF)서울사무소장은 16일 전경련 주최 세미나에 참석, “기업들이 진정한 구조조정을 달성하려면 1년으로는 불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절차의 공정성이 후유증을 줄인다〓현대와 LG그룹간 반도체 통합의 경우 통합무용론이 급속히 확산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공론화하는 것을 주저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나 민간경영연구소, 그리고 반도체 전문가들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국내 반도체산업의 무리한 통합을 우려하면서도 정부의 강공에 밀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특히 이헌재(李憲宰)금융감독위원장이 공적인 자리에서 ‘특정업체가 유리하다고들 한다’고 말하거나 대통령이 반도체 통합을 독촉하는 발언이 건전한 빅딜논의를 봉쇄한다는 지적이 팽배해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평가작업을 맡은 미 컨설팅사인 ADL과 LG그룹의 갈등. LG는 “피평가업체의 의견을 반영, 평가방법과 배점기준을 정하는 것은 컨설팅업계의 상식”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ADL은 “피평가업체의 의견에 앞서 국민과의 약속이 중요하다”며 “LG측과 일일이 평가기준 등에 합의할 시간이 없다”는 입장.
이에 대해 유명 컨설팅 전문가들은 “평가기준과 실사과정 공개 등은 컨설팅업체가 기본적으로 제공해야 할 의무에 가깝다”며 “LG와의 계약없이 평가를 강행할 경우 그 효력을 주장하기 어려운데다 추후 법률분쟁 및 책임문제의 소지가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