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대통령선거를 3개월 가량 남겨놓은 97년 9월13일 오전10시 서울 여의도 맨하탄호텔 2층 홀.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세대교체 돌풍을 일으키며 좀처럼 지지도가 수그러들지 않던 이인제(李仁濟)경기도지사가 마침내 대통령선거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세대교체만이 30년의 낡고 병든 3김 정치구조를 청산하고 신뢰받는 생산적인 정치의 틀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정치명예혁명을 완수해 국민정치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소명감 때문에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경선결과에 무조건 승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당원과 국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며 지지도 1위로 올라선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후보와 아들 병역면제시비로 지지도가 하락하고 있던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후보간의 양자대결 구도가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인제후보는 이날 독자출마를 선언하기까지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경선결과 불복이라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정치적 아버지’라고 불렀던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거듭된 만류를 뿌리쳐야 하는 갈등에 빠졌다.
바로 전날 밤 늦게까지도 이인제후보는 독자출마를 포기하고 기자회견을 아예 취소하려 하는 등 몇번씩 결심이 뒤바뀔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9월12일 이인제후보는 자신의 입장을 최종 정리하기 위해 경기 수원의 도지사 공관으로 ‘이인제 3총사’로 불리던 김운환 김학원(金學元) 원유철(元裕哲)의원과 안양로(安亮老)위원장을 불렀다.
“경선결과 승복 약속을 어기는 것은 옳지 않다. 이회창후보의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으니 때를 기다리면 기회가 올 것이다.”
세 의원은 독자출마를 만류하는 쪽이었다. 이미 당내에서 이회창후보 사퇴론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만큼 기다리면 경선 불복이라는 ‘멍에’를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논리였다.
안위원장만이 “지금 때를 놓치면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며 출마를 건의했다. 이인제후보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제가 먼저 강을 건너겠습니다. 살아남으면 뒤따라 오십시오. 제가 죽으면 강을 건너지 마십시오. 혼자서 장렬히 전사하겠습니다.”
3시간이 넘도록 난상토론을 벌였지만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자 이인제후보가 마침내 비장한 어조로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이어 이인제후보는 “혼자 더 생각해 보겠다”며 손수 승용차를 몰고 부인 김은숙(金銀淑)씨와 함께 공관을 떠났다. 이인제후보는 남한강변에 있는 친구의 별장으로 가 몇시간 동안 생각을 가다듬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순간 이회창후보 진영에는 비상이 걸렸다.그렇지 않아도 아들 병역문제로 핀치에 몰려 있던 이회창후보로서는 이인제후보가 독자출마를 선언하면 치명타를 입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회창후보가 직접 김운환 김학원 원유철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인제후보를 곧바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인제후보의 행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밤 11시경 서울 강남의 리츠 칼튼호텔의 한 객실에 다시 모였다. 난상토론이 벌어졌고 세 의원은 역시 이인제후보의 독자출마를 말렸다.
이인제후보도 마음이 흔들린 듯 다음날의 기자회견 준비를 맡았던 청계포럼 대표 김홍경소장을 급히 찾았다.
“김소장,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내일 기자회견 취소합시다.”
김소장이 펄쩍 뛰며 강하게 반발했다.
“지금와서 어쩌자는 겁니까. 늦었습니다. 이제는 취소가 불가능합니다. 전국의 지지자들에게 다 연락해 놓았고 이 밤중에 다시 연락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제는 ‘고’밖에 길이 없습니다.”
당초 12일로 잡아놓았던 기자회견을 11일 밤 김대통령의 만류전화를 받은 뒤 13일로 미뤄놓은 판에 회견을 또다시 취소하는 것은 무리한 상황이었다.
김대통령은 이미 이인제후보와 세차례나 독대하면서 이인제후보의 출마를 막고 있는 터였다. 김대통령은 71년 당시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 김대중후보에게 졌으나 승복했던 일을 이후보에게 들려주며 경선승복을 설득했다. 정치판에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나서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도 설명했다.
이인제후보가 김소장과 통화를 끝낸 뒤 5분쯤 지났을 때 어떻게 알아냈는지 조홍래(趙洪來)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이 호텔 객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지사, 대통령의 명령이오. 절대로 출마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인제후보의 출마를 막기 위해 이인제후보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소재를 파악한 조수석은 거의 명령조로 이인제후보의 다짐을 받아내려 했다.
“각하와 통화가 가능합니까.”
이인제후보는 즉답을 피한 채 김대통령과 직접 통화할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최후통첩을 던지려는 것이었으나 심야인 까닭에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13일 오전7시경 이인제후보는 출마선언에 앞서 다시 조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출마의 뜻을 밝혔다.
“결심이 섰습니다. 각하에게 제 뜻을 전해주십시오.”
“이지사, 선배를 뭘로 보는 거야. 왜 내가 그런 심부름을 해야 하나. 이지사가 직접 대통령에게 말씀하시오.”
순간적으로 화가 난 조수석은 이후보를 야단치듯 몰아세운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이인제후보는 아직 출근 전이라 관저에 있던 김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출마결심을 밝혔다. 김대통령은 어이가 없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대통령이 나름대로 이인제후보의 독자출마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회창후보 진영은 김대통령이 사실상 이인제후보의 출마 움직임을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강하게 의심했다.
이회창대표의 비서실장이었던 하순봉(河舜鳳)의원의 술회.
“이대표는 이미 몇차례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김대통령에게 이인제후보의 출마를 막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김대통령은 그때마다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청와대에 기대를 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우리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이회창후보 진영은 독자적으로 이인제후보 출마저지에 나섰다.
이인제후보가 출마선언을 하기 꼭 1주일 전인 9월6일 오후. 이회창후보의 정치특보인 강재섭(姜在涉)의원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이인제후보를 만나 담판을 벌였다.
이미 이인제후보를 만나기 전에 이회창후보로부터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제의하기로 ‘설득카드’까지 만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30분 가량 지나도록 이인제후보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일이 틀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던 차에 이인제후보의 모습이 보였다.
“강공(姜公), 내가 이대표를 도우면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죠. 이지사만 도와주면 이대표가 당선됩니다.”
“이대표는 원죄가 있어서 안됩니다.”
이인제후보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나왔으나 강의원의 간절한 설득에 차츰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강의원은 이인제후보와 헤어진 뒤 이회창후보에게 “일이 잘 될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인제후보의 행보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인제후보가 독자출마를 선언한 뒤에도 이회창후보 진영은 이인제후보의 중도포기를 위해 꾸준히 막후접촉을 벌였다.
또다른 막후라인을 통해 ‘이회창후보가 집권하면 임기 전반기에는 국무총리를, 임기 후반기에는 당대표를 보장하겠다’는 카드가 제시됐다. 하지만 이인제후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은행감독원이 9월 초부터 이인제후보와 김운환의원의 계좌를 몰래 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인제후보의 이회창후보에 대한 반감은 극도로 커졌다. 이회창후보에게 줄을 선 사정 관계자들의 짓이라는 게 이인제후보측 판단이었다.
11월 초에 접어들면서 이인제후보의 지지도가 하락세를 보이자 이인제후보 진영내에 이회창후보로 후보단일화를 하자는 ‘투항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가 기운 12월7일 2차 TV합동토론회가 끝난 직후 참모회의에서 이인제후보는 “죽어도 이회창후보가 돼서는 안된다. 내가 되면 제일 좋고 그래도 안되면 DJ(김대중·金大中)가 되는게 차라리 낫다”며 ‘투항론’에 쐐기를 박았다.
〈김창혁·김정훈기자〉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