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교수가 내는 월간 ‘인물과 사상’ 지난 9월호에 ‘익명의 공무원’이 투고한 ‘김대중대통령께 드리는 고언’이라는 글이 실렸었다. 정권교체 1주년을 맞아 각 신문들이 꾸민 특집들을 읽다가 그 글이 생각났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익명의 공무원은 낡고 때묻은 사람을 쓰지 말라, 정권 잡았다고 입장을 바꾸지 말라, 권력에 안주하지 말고 벌거벗은 마음으로 돌아가라, 적과 동지를 분명히 구분하라고 대통령에 충고했다. 그 글을 대통령이 읽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때는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대통령이 혼자 뛰지 말라는 충고를 하나 덧붙였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 정권교체 1년의 명암 ▼
정권교체 1년, ‘개혁’ ‘개혁’ 했지만 개혁된 게 뭐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러보면 세상은 많이 변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대북인식 변화다.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는데도 정부는 끈질기게 인내하고, 국민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정부의 인내를 ‘이해’하는 자세를 보였다. 대단한 변화다. 보수는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 보수의 퇴조가 사회 전체의 개혁 분위기 확산에 미친 영향은 컸다.
경제가 환란 1년만에 회복세로 돌아선 것도 그렇다. 외환위기 금융위기가 고비를 넘었다는 관측이다. 달러 환율이 1천2백원대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게 됐고 증권시장이 활기를 되찾았다. 정부는 ‘성급하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도 자율이냐 타율이냐를 놓고 정부와 재벌간에 줄다리기를 계속하다가 정부의 강력한 개입으로 결말이 나는 인상이다. 역시 예상을 넘는 변화다.
이 변화를 이끈 힘이 김대중대통령의 개혁의지와 신중한 리더십이라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저항과 냉소에 설득과 기다림과 단호함으로 맞섰다.
그늘도 많았다. 실업자가 2백만명을 헤아리고 중산층이 무너졌다. 정치는 비능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지역갈등은 격화되는 조짐마저 보인다. 일상화된 부패도 여전하다. ‘개혁의 연착륙’에 대한 대통령의 집착이 정책의 혼선을 빚기도 했다. 이 그늘은 앞으로 개혁의 큰 짐이 될 것이다.
▼ 대통령 혼자 뛰어서야 ▼
그러나 반년 전 ‘익명의 공무원’이 대통령에게 벌거벗은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한 충고에 대해서는 아직은 안도해도 될 것같다는 느낌이다. 그 시험은 앞으로 내각제 개헌문제에서 다시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대통령의 개혁철학이 분명하고 확고하다면 정부개혁 정치개혁 부패추방 사회적 약자의 문제 등은 김대중정부 2차연도 개혁으로 새롭게 추진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문제는 오히려 개혁의 1인 집중에 있다. 김대중정부에는 실세(實勢)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청와대에도 내각에도 당에도 개혁의 목표 방향 순서 수단 속도를 소신과 열정으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사람이 없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대통령 한사람 뿐이다. 개혁에 대한 정당한 이견을 들어줄 사람도 없고 대통령에게 전달할 마땅한 통로도 없다. 공무원들은 개혁에 확신이 없는 것같고 개혁의 목표에도 그리 공감하지 않는 눈치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어 보인다. 첫째, 대통령이 ‘익명의 공무원’의 충언을 듣지 않고 때묻은 사람을 썼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대통령 주변에서 몸을 던져 일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둘째, 대통령이 실세를 키우지 않고 당이나 내각에 권한을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태여 실세라고 이름 붙여볼만한 사람이 청와대 비서실 한두 사람, 그들마저 정치적 몸무게가 가볍다. 대통령 스스로 제안 결정 점검 수정 독려했다. 혼자 뛰었다.
▼ 개혁세력 결집할 때 ▼
지난 1년동안 많은 국민이 개혁의 큰 그림에 공감하면서도 그 과정이 치밀하고 투명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은 대통령 주변에서 개혁의 디테일을 자발적으로 입안하고 추진하고 홍보하는 실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기에는 대통령 혼자뛰기가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위기가 걷히면 새로운 저항이 나타날 수 있다. 경제위기가 걷히는 순간 김대중정부는 이러한 시련에 부닥칠 공산이 크다.
방법은 하나, 다수의 실세들이 대통령 주변에 포진하는 집단적 리더십을 형성해야 한다. 개혁세력을 결집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김대통령에게 주어진 밀린 과제다.
김종심(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