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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재개 황석영씨]「오래된 정원」에 이상향 담을터

입력 | 1998-12-29 19:48:00


‘장길산’의 작가 황석영이 10년간의 공백을 딛고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내년 1월1일부터 1년6개월간 동아일보에 연재할 ‘오래된 정원’은 10년간의 공백을 뛰어 넘어 내놓는 황석영문학 제2기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3월 출감 이후 경기도 일산에서 집필에 매달리고 있는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오자마자 종합진단을 받았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해서 안심했습니다. 다만 요즘 하룻밤만 세워도 피로가 심해져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게 아닌가해 다시 한번 진단을 받아볼 작정입니다. 아무래도 후유증은 안심할 수 없다니까요. 나와서는 주위의 친지들이 집필실을 마련해줘 거의 칩거하며 독서도 하고 글도 쓰면서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망명과 수감으로 황선생님에게는 공백이 된 90년대 문학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균형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이 살던 어느 시대에나 균형은 없었습니다.그러나 어쨌든 사람과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은 변화에 있습니다. 이 변화의 조짐은 90년대가 시작되면서, 냉전의 와해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한반도만 놓고 말하더라도 이같은 남북의 고난은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에 의해 세계체제가 재편되었지요. 아시아는 그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북한은 소련과 동구권 그리고 비동맹권이라는 제3세계가 와해되면서 나름대로 세계로 나가는 통로를 상실하고 자폐(自閉)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교롭게도 제가 출옥할 무렵부터 시작된 구제금융시대의 고통은 한두해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죠. 세계사적 변화로 우리의 문화계에는 몇가지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나는 역사적 허무주의와 전향의 유행, 둘째는 미국적 문화에의 노골적인 심화, 포스트모더니즘의 각광, 그리고 공동체 의식의 개인적 파편화, 대량유통 대량소비의 보편화같은 것들이지요.”

―이같은 세기말 현상이 89년으로 멈춰버린 황선생님의 문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작가가 그야말로 양계장의 닭처럼 사육되면서 계속하여 알을 낳듯이 생산하는 존재는 아니지요. 살아있는 작가는 자신의 ‘문학’을 사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 어느 모퉁이에서 직장과 안락한 가정을 기계적으로 오락가락하는 삶을 살지 않은 한, 나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은 작가로서의 마음의 바탕이 되었겠지요. 나의 문학적 삶은 죽을 때 멈출 것입니다.”

―90년대 한국문학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요즘의 문학이 너무 가벼워졌다는 말들이 있는데….

“모두들 그러더군요. 어려운 시절이 되니까 출판과 작단(作壇)의 거품이 빠지는 중이라고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꾸준히 작품을 써오며 생계를 이어온 동료 작가들에게 애틋한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렵니다. ‘가볍다’ ‘무겁다’하는 말들은 제가 보기엔 저널리즘의 소용에 따라 만들어낸 것 같고, 사람을 위한 문학이 있을 뿐입니다. 오 헨리가 있는가 하면 포크너도 있지요. 문학의 화원엔 아름다운 기화요초(琪花瑤草)와 갖가지 나무가 있기 마련 아닙니까.”

―10년만에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연재소설 ‘오래된 정원’은 어떤 이야기입니까.

“20세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 여름에서 소련이 무너지던 91년까지 가장 상징적이며 반문명적인 사건들이 숨가쁘게 진행된 ‘극단의 시대’였다고들 합니다. 바로 이 세기에 세계사의 모순이 집약된 우리 한반도는 온 민족 구성원이 몇 대에 걸쳐 다른 어느 나라의 근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뼈저린 고통을 당했지요. 세계는 이미 끝나버린 구질서의 동굴을 지나 길도 없는 새로운 세기의 대평원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과도기에 서있습니다. 나는 역사의 흐름을 주체로 하여 그 불가항력적인 와중에 휩쓸린 사람들을 다루는 흔한 방식이 아니라, 이번에는 극히 개인적인 두 사람의 사랑의 여정을 통하여 역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쓰려고 합니다. 여기서 ‘오래된 정원’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여러 시대의 종족들이 제각기 그려온 이상향 같은 것입니다. 복사꽃이 피는 따사로운 골짜기, 바다 가운데 숨어있는 돌아올 수 없는 섬,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던 선경(仙境), 아득한 산맥 어딘가 바위 틈에 입구가 있고 그 입구로 들어서면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열린 오래된 정원 등등이 있다고 믿었지요. 지난 세기는 어느 쪽을 선택했건 유토피아를 찾아 헤맸던 긴 방황의 세월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바람은 환멸로 끝났는지, 마모되고 바랬지만 희망은 있는 것인지 우리들의 주인공과 대화해 보려고 합니다.”

방북 경험과 수감 생활이 이번 연재소설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묻자 황석영은 그 얘기를 해버리면 밀도와 변화를 추구하는 연재소설의 묘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완곡하게 답변을 거두었다. 그 완곡한 거절 속엔,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를 걸어온 큰 작가의 문학적 자신감과 고집이 숨어 있다. 망명 5년, 수감 5년의 지난(至難)한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건 그의 당당함이라고 할까. 그렇게 다가올 새로운 소설 ‘오래된 정원’을 통해 이 어려운 시대, 문학과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길 독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 황석영 작품연보▼

△62년 단편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상 수상

△70년 단편 ‘탑’ 희곡 ‘환영의 돛’

△74년 창작집 ‘객지’ 대하소설 ‘장길산’연재 시작

△78년 창작집 ‘가객’

△80년 희곡집 ‘장산곶매’ 장편 ‘어둠의 자식들’

△84년 대하소설 ‘장길산’ 연재 완료, 전10권으로 출간

△85년 장편 ‘무기의 그늘’ 광주항쟁 르포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89년 방북 체험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