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올 새해 내게는 연휴가 없어졌다. 여느 해와 달리 병실공사를 마무리지어야 하는데다 토끼해 첫날부터 산모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정시간보다 2시간 정도 앞당겨 진통이 시작되더니 새벽 어둠을 가르고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다. 신생아의 울음소리는 분만실의 틈새를 벗어나 병원 전체의 고요를 뒤흔들며 쩌렁쩌렁 울렸다.
제야의 종소리 여운을 뒤로 한 채 모든 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기전의 새벽녘. 새로운 생명을 목욕시키느라 간호사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인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준비하는 새해, 첫탄생의 주인공이 된 아이는 곡절이 많았다. 결혼생활 10년간 다섯 차례의 자연 유산이라는 시련을 겪으면서 면역요법으로 지난 해 임신에 성공한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목욕을 끝내고 신생아실로 옮겨진 아기는 순수함 그 자체다. 잠시 후 포대기에 싼 아기를 엄마에게 보여주며 “올해 우리 병원에서 처음 태어난 아기랍니다. 건강한 아기 낳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축하해요.”간호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의 두 눈엔 어느새 눈물이 고인다.
분만의 고통은 진작 잊은 듯 했다. 분만실 밖에는 산모의 가족이 모여 새로운 탄생의 기쁨을 나눈다. 신생아실의 아기는 벌써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다. 분만의 큰 아픔을 견디며 엄마가 된 산모를 바라보며 불현듯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마치 그 숱한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않고 꿋꿋한 삶의 자세를 지켜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여주인공 스칼렛을 보는 듯했다. 스칼렛은 헤어날 길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마다 ‘그래도 내일에는 내일의 해가 뜬다’는 말을 떠올리며 ‘희망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고 인간이 그 희망을 잃었을 때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값진 교훈을 일깨워주었다.
지금 우리는 IMF체제 아래 너나없이 어렵고 가파른 시련의 절벽을 오르고 있다. 기업의 연쇄부도와 구조조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실직자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이웃의 자살 등 나라 구석구석마다 고통과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하지만 ‘어려움’이 전부일까?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딱한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운 훈훈함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지난 연말 흥청거릴 때보다도 더 많은 후원금이 쌓였다는 자선냄비를 비롯해 치료비가 없어 안절부절 못하는 환자를 위해 펼쳤던 모금운동, 결식아동돕기와 불우이웃돕기 성금함에도 온정이 이어졌다.
어려울 때일수록 눈높이를 낮추고 더불어사는 사회로 가는 그 수많은 사연들이 지친 우리의 영혼을 적시는 듯했다.
신생아실에서 잠든 아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신생아 면회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기 좀 보여달라’고 채근하신다. 손자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니까 특별히 일찍 면회시켜드릴게요”라고 말하며 아기를 보여드렸다.
그들의 얼굴에서 모처럼 환한 웃음이 넘쳐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새해에는 우리 국민 모두가 그동안 잃을 뻔했던 희망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박금자(박금자산부인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