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기뻤지만 쑥쓰럽기 그지없다.
마치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얼떨결에 ‘전국노래자랑’에 나가게된 격이라고나 할까. 예술과 학문이 삶을 표현하고 풍요롭게 하는가 하면, 신분을 높이고 위선을 은폐하기 위한 장식물로 기능하는 경우가 있다.
이중섭처럼 예술과 사랑을 죽음에 이를 정도까지 밀어부쳤던 비극의 예술가들은 매우 그럴듯한 장식물이 된다.
지난 40년동안 중섭예술은 다분히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며 사랑을 받아왔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것도 없는 것같다.
우리의 해방 50년은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쓰며 살 수 없었던 격동의 세월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보다 젊은 세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느끼며 글을 써야할 것이다.
나는 이중섭론에서 종족적(種族的) 미의식이란 정체불명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번 수상은 그것이 받아들여졌다는 뜻인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점이 신기하고 기쁘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격려와 충고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이 걸려 있는 곳을 좋아한다. 더구나 그 그림이 누군가의 특별한 관심 속에 걸려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림에 관한 나의 글쓰기 역시 그같은 관객의 입장에서 시작된다.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기회가 닿는대로 관객의 입장을 고려하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해본다. 불충분한 원고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58년 강원 철원 출생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 수료 △저서 ‘편견없는 김대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