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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의 「우리거리」 읽기1]세종로 戀歌

입력 | 1999-01-04 19:10:00


《우리는 늘 거리를 지나 어딘가로 향한다. 거리는 사람의 공간이다. 거리에는 역사가 있고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99년 ‘건축문화의 해’를 맞아 우리의 거리를 깊이 있게 탐색해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사람이 사라진 서울 광화문 앞 세종로, 역사가 지워져 버린 종로,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달동네 거리, 개항(開港)의 쓰라린 흔적이 남아 있는 인천 군산의 거리, 그리고 해인사 수덕사의 산사(山寺)로 향하는 거리까지. 그 모든 거리는 ‘사람 중심의 거리’가 되어야 한다.그러나 우리의 거리는 어떠한가. 사람보다는 차량이 우선하고 사람보다는 위압적인 건축물이 압도한다. 우리 거리엔 진정 사람의 숨결이 남아 있는가. 젊은 건축학도 서현씨의 새롭고 깊이있는 눈을 통해 우리의 거리에서 사람과 역사를 만나보자.》

종로에 서면 샹젤리제(avenue des Champs―Elyses)를 생각하게 된다. 파리 시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자부하는 바로 그 거리. 세종로는 샹젤리제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산, 그리고 600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광화문(光化門)이다. 광화문은 개선문보다 아름답다. 개선문처럼 칼바도스 향기나는 이름의 소설은 아직 없어도 그렇다. 콘크리트로 지은 아쉬움은 있어도, 통치자의 한글 현판이 그 깊은 뜻을 덮어도 광화문은 그냥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름답다.

대원군의 중건 때까지 광화문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궁궐을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개국의 그 순간부터 왕조의 영고성쇠를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유배의 시기도 있었다.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사라지려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로 대표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하여 총독부의 철거의지를 힘겹게 견뎌냈다. 그러나 결국은 경복궁의 동문 건춘문(建春門)의 옆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의 포화는 광화문도 비껴가지 않았다. 우리에게 현대사는 그리도 거칠게 시작되었다.

광화문은 그 영욕의 시간을 지나 1968년에야 지금의 자리를 다시 찾았다. 왜적을 맞아 싸우다 돌아가셨다는 이순신 장군과 광화문의 등 뒤에서 조선총독부 청사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주인처럼 웃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북악산도, 광화문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 건물이 사라진 뒤에야 북악산과 광화문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임금님도 육조의 관리들도 사라진 오늘, 광화문이 굽어보던 육조 거리는 세종로가 되었다. 세종로는 경건한 우리의 신화다. 그 역사가 민초들의 역사가 아니고 제왕의 역사였을지라도 그렇다. 그 길을 걸어보자. 지하철 광화문 역에서 내리자.

세종로에서 가장 북적대는 거리는 광화문 지하도다. 그 길은 작은 시장이다. 수출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들고 나왔다는 사진첩도 있고, 사랑하는 부인들을 위해 아저씨들도 하나씩 구입하라는 마늘까개도 등장한다. 잉크만 겨우 마른 신문으로 세상 소식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배달되기도 한다. 거리에는 이렇게 기웃거릴만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들어가서 뭔가를 사들고 나올 수 있는 김밥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종로에서 소매점들은 세종문화회관에 이르기 전에 끝난다. 거기까지가 ‘우리’의 거리다. 나머지는 권력과 자동차가 장악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는 설 수 없던 시절도 있었다. 음악회에 앞서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울려 퍼져야 했다. ‘황국신민서사’를 연상시키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울 수 있는 모범생만 그 문화의 주인공이었다. 그 때까지도 세종문화회관의 주인은 모든 시민이 아니었다.

이제 시민의 모습도 세종문화회관에 새롭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훈아의 콘서트는 공연을 보름도 훨씬 넘게 앞 둔 무렵 이미 ‘완전매진’이라고 써 붙여야 했다. ‘우리’의 문화가 무엇인지 명쾌히 보여 주었다.

세종문화회관에는 널찍한 계단도 있다. 이 계단은 올라가기보다 걸터앉기 더 좋은 곳이다. 길거리 극장의 열린 객석이다. 객석에 앉으면 뭔가 신나는 것, 뭔가 재미있는 것이 보여야 한다. 구경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단연 사람구경이다. 여기서 북적거리며 오가는 사람들이 앞에 보인다면 이 자리는 극장안의 것 보다 더 신나는 객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의 길거리 객석에서는 을씨년스런 차량의 행렬만 가득히 보인다.

좀 더 걸어보자. 옛 사헌부 자리는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지상은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을씨년스럽기만 하고 지하에는 자동차가 가득하다. 세종로에 주차장을 만드는 사고는 더 많은 자동차를 타고 이 곳의 건물들에 오겠다는 오만한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의 신화에 대한 모욕이다. 보행인은 구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중앙 지하도를 건너온 이들을 위해 마련된 인도의 폭은 1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세종로의 건물들은 노골적으로 오만하다. 정부종합청사, 문화관광부, 주한 미국대사관은 모두 세종로 앞에 벽을 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을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무총리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어도 세종로에 주차장을 들이대고 있을 수는 없다. 문화관광부장관과 미국의 대사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 이 건물들이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면적만 빼내도 세종로의 한가운데는 시민의 거리가 될 수 있다. 자동차는 옆으로 비껴가도 된다. 지하로 다녀도 된다.

시민들이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광화문은 정녕 가치가 있다. 이순신 장군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할 수 있는 세종로가 아름답다.

지속적인 노력의 흔적은 분명 있다. 새로운 시대답게 새로운 신문고를 설치한 공원도 광화문 앞에 자리 잡았다. 마당놀이나 야외공연을 위한 열린 마당도 있다. 그러나 자동차가 만드는 소음이 70데시벨을 넘는 거리에서 공연은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선발된 모범생들이 전시용 농악놀이나 할만한 도시공원만으로 거리는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는 맛있는 군밤과 햄버거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거리여야 ‘우리’의 거리다.

광화문 앞의 서태지 팬사인회 때문에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보도도 나오는, 그런 거리가 아름답다. 어린 아이의 웃음이 햇살처럼 번지는 광화문. 그들이 더 나이를 먹었을 때도 첫눈은 올 것이다. 그 때 만나자고 연인과 약속하는 그 곳으로 광화문을 만들자. 그러면 ‘낙엽은 지고 눈보라쳐도 변함없는’ 우리의 사랑으로 서울은 남게 될 것이다. 그 때 햇빛 아래 빛나는 광화문은 라비크가 어둠 너머로 바라보던 음울한 개선문보다 정녕 더 아름다울 것이다.

서현

★필자 약력★

△63년 서울생 △현건축 소장 △서울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 졸업△미국 콜럼비아대 건축대학원 졸업△한국 및 미국건축사 전공△저서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