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수평선에 못보던 배 한척이 터억 걸려있다. 밤새도록 달려온 모양이다. 백사장이 밤새도록 눈물이라도 흘린 듯 긴 ‘물자욱’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보면 그것이 어찌 그리도 모래의 눈물 자국으로 보이는지…. 아마도 파도가 썰물이 되어 밀려나가다 보니 생긴 자국이겠지. 그 위로 찬란한 아침의 햇빛이 비치고 있다. 몇 사람이 모래 사장 위에서 뜀박질을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뛰는 것을 따라서 뛰는 그림자도 있다. 그런데 나의 눈에는 그 사람들보다 그 사람들의 그림자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허상좇는 인간군상 ▼
그것들은 아주 새까맣다. 새까맣게 백사장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품이, 꼭 그림자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 것도 같다. 모래 사장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 사람들은 아마도 달리기를 하는 모양이다. 저마다 자기보다 큰 그림자들을 업고 이쪽 모래에서 저쪽 모래로 달리고 있다. 모래 사장의 흰색에 비쳐 더욱 새까만 그것들, 사람들이 달릴 때마다 더욱 길고 깊게 모래땅에 박히는 그것들, 그것들의 큰 키와 ‘반짝이는 까망’ 때문에 정작 그것들의 주인인 사람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장자의 이야기 중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들로부터 떨어지려고 달린 자가 있었소. 그러나 발을 들어올리는 횟수가 잦으면 잦을수록 그 만큼 발자국이 많아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소. 그래서 아직 느리게 달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빨리 쉬지않고 달리다가 힘이 빠져 죽고 말았소. 그 사람은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없어지고멈춰있으면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거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오!’(장자 잡편·莊子 雜編, 어부·漁夫 중에서)
그러면 장자가 말하는 그림자란 무엇일까. 진짜가 아닌 그 무엇, 허상, 진짜 가치가 아닌 그 무엇, 이를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정신이 없이 높디 높은 건물, 빠르디 빠른 자동차, 또는 늘 세계 최대를 찾는 것, 세계 최대가 아니라면 동양 최대를 찾는 것, 1등을 찾는 것, 최고를 찾는 것, 높은 ‘그 사람’이 아니라, ‘높은 의자’위의 사람을 찾는 것. 가끔 뉴스 같은 것을 보면 높은 사람의 얼굴 대신 그 직위를 보여주는 의자만이 보일 때가 많은데(공무원 범죄의 장면 같은데서 특히 그렇다. 그런 뉴스를 보고 있으면 중요한 것이 사람이 아니라 의자라는 생각이 든다)―바로 그 의자의 등받이 같은 것, 또는 무엇으로 그런 집을 마련했는가가 문제가 되지않는 뜰과 정원이 있는 화려하고 넓은 집….
▼실체의 향기 풍기게 ▼
그렇다면 장자의 성찰은 오늘 이 아침에도 맞는지 모른다. 모두 그림자에서 도망가기 위하여, 그러나 그림자들을 좇는 것이다. 우리들은 일생동안 그림자의 그림자들을 좇다가, 또 그 그림자의 그림자들을 좇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런데 어떤 그림자들을 향하여 지금 우리들은 뛰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빨리 뛴다고 해서 더 빨리 무엇엔가 가 닿을 것도 아니련만…. 속된 말로 더 빨리 죽음에 이르는 것 뿐이련만….
IMF 때문에 내려갔던 골프회원권 값이 다시 뛰어오른다고 한다. 마땅히 투자할 데가 없는 돈이 많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많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보이는 부패한 도덕성일 것이다(80년대 민주화운동은 당시 사회 각 방면에서 ‘청렴’을 만들지 않았을까). 다시 돈이 가장 중요한 우리 사회의 덕목이 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사회를 들먹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바로 그림자이다. 그림자가, 보다 높은 그림자가, 그리고 그 그림자를 좇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아침이다. 보다 향기로운 그림자를, 당신의 키보다 그 그림자가 비록 짧더라도 정오의 새까만 그림자를 이 나라의 아름다운 모래밭에,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모래밭에 뿌려라. 그림자들에서, 모든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림자들에서 향기가 피어오르게 하라. 제발 그런 한해가 되어라.
강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