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주재런가 맑고 고운 산/…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그 몇몇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1절)//비로봉 그 봉우리 예대로인가/…발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우리 다 맺힌 슬픔 풀릴 때까지(2절)’
지난해 11월 금강산 관광의 문이 열린 이래 1만3천여명이 금강산 1만2천봉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그러나 국민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 최영섭(崔永燮·70)씨는 정작 아직 금강산에 발을 딛지 못했다. 북한측이 현대측과 금강산 관광 협상을 하면서 ‘그리운 금강산’을 금지곡으로 통보했기 때문. 작사자는 작고 시인 한상억(韓相億)씨.
최씨는 “혹시나 금지곡의 작곡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북한측에서 하선을 못하게 할 것 같아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 출신인 최씨와 금강산의 인연은 경복중 재학 시절 졸업여행지로 금강산이 예정돼 있었던 것이 처음. 그러나 2학년 때 해방과 함께 남북이 분단돼 금강산에 갈 수 없었다. 그로부터 16년 뒤인 61년.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후 대학에 출강하고 있던 그는 KBS의 의뢰를 받아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을 작곡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그리운 금강산’이었다.
이 노래는 발표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면서 애창되기 시작했다. 최씨는 남북화해를 위해 작사자와 의논, 원래의 ‘더럽힌지’ ‘짓밟힌 자리’ ‘맺힌 원한’ 등 세구절을 각각 ‘못가본지’ ‘예대로인가’ ‘맺힌 슬픔’ 등으로 고쳤다. 85년 남북예술단 교환공연 때는 소프라노 이규도씨가 평양에서 이 노래를 불러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다.
최씨는 “그러나 그후 북한측은 원본 가사집을 입수했는지 ‘그리운 금강산’을 금기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첫구절의 ‘누구의 주재런가’도 출판 당시 ‘주제런가’로 잘못 인쇄된 것이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9월 고희를 앞둔 최영섭씨의 생활은 이 노래의 행로처럼 순탄치 않았다. 그는 78년 조강지처를 잃은 뒤 자신이 지휘하던 관현악단에서 만난 20세 연하의 플루티스트와 새 가정을 꾸몄다. 하지만 예술의 동반자이자 생의 반려자였던 플루티스트는 몇년 전 새처럼 날아가버렸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파랑새를 잃은 충격으로 최씨는 2년간 경기도 안양의 한 전셋집에 칩거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하지만 지난해 ‘장한 예술가의 어머니상’을 받은 그 어머니마저 20일 전 95세를 일기로 훌쩍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낮에는 빈집에서 혼자 올가을 무대에 올릴 오페라 ‘운림(雲林)’을 쓰고 날이 저물 무렵에는 홀로 석양주(夕陽酒)를 마신다.
“내 나이 일흔. 음악가로서의 희열과 영광, 예술적 절망과 인간적 비애…. 많은 일을 겪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음악과 함께 살겠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꼭 금강산에 가 허밍으로라도 ‘그리운 금강산’을 맘껏 불러 보고 싶습니다.”
〈신연수기자〉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