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와 알선료, 전관예우 관행…. 사건을 맡기 위해 연줄과 브로커가 동원되고 때론 돈봉투까지 오간다. 대전 변호사 수임비리사건은 법조계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달라질 수는 없을까. 요즘 변호사업계에선 ‘기획소송’이란 새로운 방식의 소송이 주목받고 있다. 변호사가 소송거리를 발굴하고 기획해 의뢰인을 찾아나서는 방식이다. 전관예우 관행에 밀리고 브로커의 극성에 치인 젊은 변호사들이 모색하는 제삼의 길이다. 잠자고 있는 개인의 권리를 일깨우는 동시에 변호사 수입의 새 터전도 개척할 수 있어 경우에 따라선 일석이조(一石二鳥). 그러나 소송 만능주의를 초래하거나 변호사가 돈만 쫓는 이른바 ‘앰뷸런스 추적자(ambulancer chaser)’로 전락할 위험성도 안고 있다. 기획소송의 명암을 가려보았다.》
지난해 봄 한가로이 신문을 읽던 강용석(康容碩·30)변호사는 한 교통사고 기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도로상의 하자도 사고의 한 원인’이라는 기사 문구에 ‘뭔가가 있겠다’는 직감이 떠올라 곧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전북 부안의 사고 현장은 바닷가와 붙어있는 T자 도로. 언뜻 보면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대로 달릴 경우 자칫 바다로 떨어질 위험이 큰 도로였다. 그러나 위험을 경고하는 도로표지판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유족을 찾아갔다. “본인의 과실도 있지만 도로표지판을 설치하지 않은 국가의 책임이 크다”며 소송을 하라고 설득했다. 3백만원의 소송비용과 착수금은 자신이 부담한다는 조건이었다. 유족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동의했다. 강변호사는 자료를 더 보강해 지난해 6월 국가를 상대로 5천만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지금도 승소하기 위해 뛰고 있다.
그는 부산 동래구 안락동에 위치한 ‘충렬로’란 지명의 도로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충렬로는 설계상의 하자로 지난 한 해에만 23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던 곳. 그는 피해자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라고 권유하고 있다. 마침 지난 6일엔 이 도로의 공사와 관련된 공무원과 건설업자들이 비리혐의로 검찰에 구속돼 상황은 한결 유리해졌다.
강변호사의 경우처럼 변호사가 직접 소송거리를 찾아 발굴하는 이른바 ‘기획소송’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변호사를 사는’시대에서 변호사가 먼저 소송을 기획해서 ‘잠재적 의뢰인’을 찾아내는 적극적 소송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기획소송을 주도하는 세대는 주로 30대 초 중반의 젊은 변호사들.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이 민사 형사사건을 독식하고 브로커를 쓰거나 공무원들에게 알선료를 줄만큼 탈법관행이 판치는 상황에서 젊은 변호사들이 ‘제삼의 길’로써 기획소송 시대를 열어 나가고 있는 것. 변호사수의 급증도 이런 추세를 부추겼다.
획소송의 원 줄기는 시민단체와 변호사들이 연계해 벌이는 공익소송(公益訴訟). 고 조영래(趙英來)변호사가 주도한 84년 망원동 수재사건 소송을 효시로 하는 공익소송은 현 정부 출범이후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지난달 지하철 2호선 역 곳곳에는 낯선 부스가 등장했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와 젊은 변호사들이 같은 달 7일 발생한 지하철 2호선 운행정지사건 때 갇혔던 시민들을 찾아 나선 것. 이들은 피해시민 20명을 찾아내 서울지하철공사를 상대로 1인당 1백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소송 영역도 시민 생활 곳곳으로 뻗어가고 있다. 김칠준(金七俊·41)변호사는 “한국통신이 시티폰 기지국 관리를 소홀히 해 통화불능지역이 확대되고 있는데도 기본료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며 가입자 5명을 선정해 정보통신위원회에 기본료 환불요청서를 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즉각 소송에 들어갈 계획이다.
기획소송 거리를 발굴하기 위한 정보수집 경쟁도 치열하다. 노동법 전문인 고태관(高台官·31)변호사는 요즘 기업의 인수합병(M&A)사례들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다. 단체협약에는 인수합병시 노동조합과 협의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기업들이 노조와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인수합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칠준 변호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중소기업 법률학교’를 열고 있다. 대형 로펌(법률회사)에서 외면받는 중소기업의 법률적 문제를 카운슬링하기 위해서다. 김변호사는 이런 활동을 통해 중소기업과 관련된 다양한 기획소송을 구상하고 있다.
익소송 중엔 변호사들이 소송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획소송은 변호사들의 ‘밥벌이’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모 변호사는 “기획소송은 명분도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가 공기업 지자체 대기업 등을 상대로 한 집단소송인 경우가 많아 경제적으로도 소득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기획소송은 앞으로 우리 소송문화의 한 주류로 급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제일은행 소액주주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참여했던 김주영(金柱永)변호사는 “소비자 환경 주주 정보청구 등 첨단분야에서 기획소송이 두드러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부실회계감사 지적재산권 공정거래 분야 등도 기획소송이 활발해질 분야로 꼽힌다.
밀레니엄 버그도 대표적인 기획 소송 감이다. 미국에선 밀레니엄 버그로 1조달러가 넘는 소송 특수(特需)가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내의 대형 법률회사들도 밀레니엄 버그를 다룰 기획소송팀을 구성 중이다.
서울대 법대 윤진수(尹眞秀)교수는 “기획소송은 ‘권리위에 잠자고 있는’ 자를 일깨워 주고 대기업이나 행정당국이 소비자와 국민을 두려워 하게 만드는 긍정적 측면이 많다”고 말하고 “그러나 불필요한 소송을 부추겨 소송만능주의로 흐르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