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업종이 얼마나 괴롭고 고달픈 3D직종인지 광고업계 밖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멋진 탤런트들도 자주 만나고 TV에 광고가 나올 때면 ‘저거 내가 만들었어’하고 거드름을 피울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한숨짓는 괴로운 직업. 애인이 아닌, 아이디어를 그리워 하면서 또 하루가 지나가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몇날 몇밤 끙끙거리다 빅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기뻐하면서 만든 광고안을 광고주에게 제시했는데 단 몇초도 생각하지 않고 거부반응을 보일 때의 좌절감. 광고인이 아니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심적 폭동’을 겪는다. 이렇게 피를 말리는 듯한 직업에 젊은이들은 왜 환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다 해놓고 보면 그렇게 간단하고 누구나 다 할 것 같은 쉬운 일을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통받으면서 20년이 넘도록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사람들과의 만남때문이 아닐까.
광고는 말 그대로 커뮤니케이션산업인지라 그 제품을 만든 사람, 그 제품을 쓰는 사람, 그 제품을 만들게끔 한 사람, 그 회사를 끌고 가는 사람 등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는 좋은 광고를 만들기 어렵다. 내가 감동받은 이야기들이 결국 소비자에게도 감명깊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트 광고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있다.
‘쉿!’이라는 카피로 많은 상을 휩쓸었던 자동차광고 역시 정작 박수받을 사람은 제품을 만들고자 심혈을 기울였던 이들이 아닌가 싶다. 소음이 얼마나 줄었는지 실험하기위해 달리는 차의 트렁크 속에 쭈그리고 들어가 있었다는 ‘드라마’가 있었기에 그런 카피가 탄생되었으니까.
‘이 제품에는 우리의 혼이 들어 있습니다.’ 제품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었던엔지니어의 말 한마디가제작진을 감동시켜, 만년 3등하던전화기를 1등으로 끌어올리는광고가나온 적도 있다.
며칠전에는 평소 존경하던 모은행 회장을 만나 아이디어를 얻었다. 은행장 시절 광고주였고 지금은 회장으로 있는 그는 한번 더 행장을 맡으라는 제의에도 미련없이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어 박수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활기넘치는 모습으로 미래를 이야기했다.
자신들은 산업1세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덕에 오늘이 있었지만 이제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은 어떤 것인지’도 보여줘야 할 때라는 얘기였다. “나이들어 돈 좀 있는 사람이면 대부분 맛난 것 먹고 골프나 치면서 시간을 축내는데 과연 그렇게 해서 산업1세대가 2세대에게 무엇을 남기겠나. 결국 열심히 일한 것이 만년에 놀기 위함이었다는 얘기밖에 안된다. 자원봉사든 경비직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또 다른 삶을 준비하면서 인생이란 꼭 높은 곳만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고, 낮은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텐데…”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면서 한달여 동안 끙끙 앓았던 기업 PR아이디어가 떠올라 가슴이 뛰었다. “고마워요 회장님.”
광고란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 사람속에서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그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그런 매력에 빠져 오랜 세월 동안 싫증안내고 일을 계속하고 있는 듯 싶다.
문애란(웰콤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