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무산. 이념의 깃발만이 공소하게 나부끼던 시절, ‘머리’만 있고 ‘몸’은 빈 80년대 민중시에 용광로처럼 뜨거운 피와 살을 들이부었던 시인. 그가 이 출렁이는 세기말에 우리 곁을 찾아왔다.3년만에 펴내는 세번째 시집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작과비평사).
한 세기가 다한 바다, 격정과 눈물과 폭풍이 지나간 바다, 이 텅 빈 겨울 바닷가에 선 민중시인. ‘십구 세기에나 살았으면 좋았겠고, 이십일 세기에도 어울릴 것 같은데, 이 시대에 살기엔 참 곤란한 존재’였던 시인. 그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아, 이제 날 수정할 수는 있겠다/사는 짓도 인생도 내 아직/털끝 하나 잡지 못했어도/이제 날 수정할 수는 있겠다…’
그는 변했다고 한다. 시의 말투부터가 달라졌다고 한다. 예전의 그 목소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 자신 내심(內心)을 이렇게 토로한다. ‘그만 그냥 두어라/생명이란 물질이 기울어진 것이니//…바로 세우자니 통조림처럼 숨막히고/기운 채 두자니 세상과의 불화가/끝이 없구나…’
그는 이제 새로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사랑과 자연의 기운으로 생명과 아름다움을 노래하고자 한다. 보리밭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더운 바람이 풀내음을 몰고와 하늘이 출렁거릴 때, ‘지구의 살냄새’에 몸을 던지려 한다. 차라리 쬐그만 냉이꽃 한 송이에서 ‘지금 지구를 이고 지구를 버티고/감당하고 있는’ 어떤 삶의 실체를 읽으려 한다.
그래선가. 주위에서는 그가 선적(禪的) 세계로 극단적으로 이동하고 있다느니, 그전엔 희망의 과잉이었다면 이제는 회의의 과잉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무성하다.
그의 대답. “시가 무엇을 만들고 세우고 굳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 허물고 기울고 흔들리게 하고 비워내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