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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제 실시 1년]샐러리맨 『24시간이 짧아요』

입력 | 1999-01-25 19:46:00


‘월급 얘기는 금기(禁忌), 회식 식비도 내것만 따로, 퇴근 뒤엔 한 잔대신 학원으로.’

지난해 초부터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기업의 달라진 직장풍속도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많은 기업들이 앞다퉈 도입한 연봉제는 이제 샐러리맨들의 의식은 물론 생활패턴조차 바꾸어 놓고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4백개의 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이미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기업(28.9%)보다 올해 연봉제를 도입하겠다(44.8%)고 밝힌 기업이 더욱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봉제가 구조조정 경쟁력강화의 방안으로 채택되는 추세를 보여준다. 조사대상 기업은 국내 증시 상장기업 2백1개,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에 소속된 미국계 기업 1백99개.

연봉제 실시 1년, 달라진 직장 풍속의 큰 변화를 짚어본다.

▽급여액수 얘기는 금물〓홍보대행사인 중소기업 A사. 급여와 관련된 대화는 해고사유다. 일찌감치 연봉제를 도입한 대기업 D사는 인사위원회에 회부되는 중징계사유. 서로의 연봉이 알려지면 서먹해지고 사내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판단에서다. 연봉제가 주류인 구미 회사내의 상식이 우리 기업에도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더치페이’ 확산〓대기업 계열사 L사의 점심시간. 식사를 마친 4명의 직원은 각자 먹은 만큼의 돈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한 사람이 이를 취합해 셈을 치른다. 임모대리(29·여)는 “누가 연봉이 많은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각자 계산하는 것이 서로에게 부담도 없고 편하다”고 말했다. 임씨는 “합리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가끔 옛날이 그리워진다”고 말했다.

▽경쟁상대는 동료〓홍보대행사 A사 강모대리(30·여)는 얼마전 밀린 일 때문에 밤늦게 남아 있다 동료로부터 ‘견제’를 당했다. 한 동료가 “야근수당도 안 주는데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며 핀잔을 준 것.

S사의 윤모과장은 “서로간의 업무에 관한 정보교환도 예전같지 않다. 선후배 사이뿐만 아니라 동기간에도 경쟁의식으로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고 말했다.

▽자기계발 박차〓“출출한데 한잔하지” “2차는 내가 살게…”하는 식으로 이어지던 퇴근후 동료와의 술자리는 급속히 줄었다. D사 이과장은 요즘 영어학원을 다니느라 술마실 시간도 없다.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과장은 “위기를 느껴 시작한 공부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소홀히 했던 영어회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 결속력 약화〓노조원들의 결속력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노조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인 임금협상이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 D증권의 한 노조간부는 “최근엔 노조사무실을 찾는 사람이 없어 썰렁하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L사의 인사를 담당하는 신모상무는 “연봉제 실시에 따라 직장문화도 빠르고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며 “연봉제 확산은 시대적 추세로 자리잡은 만큼 가능한 한 부작용을 줄이고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노사양측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기자〉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