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때일수록 가족간의 사랑이 큰 힘이 된다’는 멘트가 흐르는 조미료광고가 TV화면을 따뜻하게 채운다. 그러나 뒤이어 방영되는 뉴스시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가 발표된다.
힘이기도 하고 질곡이기도 한 가족관계의 이율배반성. 일상에서 무시로 부딪치는 이 딜레마에 대해 소설가 조경란(30)은 결코 해피엔딩의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번 주 출간된 그의 두번째 장편소설 ‘가족의 기원’(민음사)은 ‘천륜’‘육친’‘가족애’같은 단어들에 근원적인 반문을 던진다. 마치 한세기 전 엥겔스가 동명의 사회과학서에서 일체의 감성을 빼고 ‘가족’을 사유제의 기초로 건조하게 파악했던 것처럼….
“살기 위해서, 정말 모두가 다 살아남기 위해서 헤어질 수밖에 없는 가족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요즘같은 상황에 비난받을 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요.”
작중 화자는 서른살의 여자 유정원. 빚더미에 올라앉은 집안에서 아들몫을 해야하는 세자매의 장녀지만 가족을 구하기 위해 생존전선에 나서는 대신 집을 떠난다.
맨손으로 서울로 올라와 건설현장 막노동으로 세 딸을 대학까지 교육시킨 부모. 그러나 정원은 부모들의 그 맹목적 헌신에서 자란 것은 사랑이 아니라 세 딸의 허위의식일 뿐이었다고 고백한다.
‘미스유’로 불리며 싸구려 부품취급을 당하는 직장생활을 채 한달도 못 견디고 무위도식해온 자신. 가족내 유일한 월급장이로 생계를 떠맡았던 둘째는 캐나다로 도피했고 대학원생인 셋째는 철없이 해외유학 꿈에 젖어 있다.
아버지가 가출하고 집이 끝내 경매에 넘어가 엄마와 동생이 여관방에 나앉았다는 소식에도 정원은 오히려 자신을 찾을 수 없는 더 먼 곳으로 떠난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우리가 같이 살아도…. 함께 산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이제 없어. 각자 어떻게든 혼자서라도 살아가야지”
작품속에서 ‘집’과 ‘방’은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해체돼가는 가족을 보여준다. 부모가 빚을 끌어대 지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집의 완성이 결국 가족의 붕괴를 불러온 정원의 집. 집주인도 딸도 마치 손님처럼 머물다가던 정원의 하숙집. 매일밤 매맞는 아내의 신음소리가 들리던 앞집. 그리고 아내의 시신과 6개월간 동거한 아래층 노인의 집….
마지막 순간 정원이 한 일은 자신이 지금껏 지녀왔던 모든 집의 열쇠를 던진 것이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