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부동의 원칙만으로 정치를 해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흔히 정치를 살아있는 생물에 비유하기도 하고 굴신력(屈伸力)을 발휘한 정적들간의 타협이 ‘극적인 드라마’로 미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지켜야 할 원칙조차 없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마저 유명무실해지는 정치가 되면 위정자들이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 세상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최근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혼란스럽기에 하는 말이다.
우선 김영삼전대통령(YS)의 국회 경제청문회 증인출석 문제부터 그렇다. YS의 증언을 둘러싸고 온갖 논란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은 불퇴전의 입장을 고수했고 YS에게 국회 명의의 출석요구서를 보낸 게 불과 며칠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김대중대통령과 김종필국무총리의 26일 청와대 회동 후 상황이 뒤바뀌었다. 여권이 YS의 간접증언, 또는 성명발표 선으로 물러서면서 “이제 그 문제는 물 건너 갔다”는 얘기가 대세를 이루는 분위기다. 드러난 명분은 김대통령이 언급했다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하다. YS의 직접증언이 들어도 좋고 안들어도 좋은 것이었다면 그동안의 정쟁은 다른 목적을 위한 정략이었다는 뜻이고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이라면 지금 진행중인 청문회는 명분도 원칙도 잃은 소모전이기에 더 계속할 이유가 없다. YS는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전직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YS의 차남인 현철씨 사면문제도 또 무슨 얘기인가. 김대통령은 25일 국민회의 김상현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작년 8·15 때 법무장관에게 사면을 강력히 지시했으나 법원 판결이 나지 않아 못했다”고 얘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정을 미루어 볼 때 현철씨에 대한 이번 3·1절 사면도 여권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검토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비록 은사권(恩赦權)이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 해도 몇가지 의문은 남는다. 현철씨가 저지른 죄의 양과 질이 다른 범죄인들의 그것과 비교할 때 사면해줘도 합당한데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철씨의 사면이 현재의 국가적 난국을 극복해나가는 데 시급하고도 불가결하다고 판단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므로 그런 정도의 ‘특혜’는 받아도 좋다고 판단하는 것인지.
엎치락뒤치락하는 김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총재간의 여야총재회담을 포함해 이런 얘기들이 모두 영남지역의 이른바 ‘심상치 않은 민심’이 정국현안으로 대두되고 한나라당의 마산군중집회 직후에 나오고 있어 더욱 뒷맛이 씁쓸하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여 특정지역정서를 추스르기 위한 방편이라면 더욱 납득하기 힘든 발상이다.
그토록 나라안팎의 기대를 모았던 역사적인 정권교체 1년 남짓 만에 나라사정이 이에 이른 근인(根因)을 거시적이고 겸허하고 냉정하게 찾는 노력 없이는 안된다.
정치권 바깥으로 시야를 넓히지 못하는 정략적 접근이나 유언비어 금지법, 지역감정조장 처벌법 같은 것으로 다스려 보겠다는 근시안적 대증요법으로 오늘의 상황을 호전시키려 한다면 그야말로 오판이다.
이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