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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생각하며]한비야/말 안통해도 마음은 통하더라

입력 | 1999-01-28 19:22:00


“다른 나라 오지에 가서 말이 안 통하면 어떻게 하나요?” 사람들이 흔히 묻는 말이다.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까지 안 통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2천1백일간의 세계 오지 여행 끝에 얻은 결론이다. 정말이다. 말 한 마디 알아듣지 못하는 깡촌에서도 나는 그곳 사람들과 수많은 말을 나눌 수 있었다.

중국 서쪽 끝 신장성의 실크로드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깊숙한 사막마을로 들어가는 붐비는 버스 안에서 여자아이를 무릎에 앉히게 되었다. 이 위구르족 꼬마는 중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고 나는 위구르말을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는 15시간 동안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아이 집에서 민박을 하며 수제비도 만들어 먹고 한글로 식구들의 이름을 써주며 배꼽 빠지게 웃고 놀았다. 떠나는 날, 아이는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고 아이의 엄마는 나를 못가게 하느라 신발을 감추었다. 말은 단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깊이 주고 받았다.

지금 이 세상에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나는 여행을 통해서 알았다. 에티오피아 오지에 가면 아직도 구석기시대의 생활이 그대로 남아있고 중동 사막의 베두인족에게는 구약시대 유목민의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이렇게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깡촌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말이 통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얻은 결론은 간단하다. 서로를 주의 깊게, 아주 열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열심히 들어주려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서로의 삶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하기야 동물과, 심지어 나무나 풀과도 말이 통한다는데 인간끼리 통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같은 말을 쓰면서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말이 안 통하다니.

며칠 전 TV에서 ‘황혼이혼’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그 말 잘 한다는 변호사와 교수들이 말이 안 통해 좌충우돌하는 것을 보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서로 자기 말만 내세우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남의 말 도중에 누가 더 잘 끼어들며 누구 목소리가 더 큰지 내기를 하느라 다른 의견을 들어볼 의사도 노력도 없는데 누군들 말이 통하겠는가.

요즘 새로운 세기를 맞아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하다. 여러 분야에서 여러 말을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급변하는 시대에 다양한 사고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말이 통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더욱 고립의 시대로 치닫는 현대인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절실한 과제일 것이다.

풍요로운 삶은 풍요로운 인간관계에서 나온다. 그것은 서로 말이 통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말이 통하려면 내가 말을 하기 전에 상대방의 생각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의견을 들어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람은 왜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두 개인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