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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칼럼]한국검찰의 「크토 카보」

입력 | 1999-01-29 19:06:00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물고늘어져 동반처형된 사례로 남이(南怡)와 강순(康純)의 고사를 꼽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5백31년전인 1468년, 조선 8대 임금 예종(睿宗)이 즉위한 해에 간신 유자광(柳子光)은 27세의 청년으로 병조판서에 올랐던 28세의 남이 장군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南怡와 康純의 故事 ▼

당연히 친국이 열렸고 남이를 혹독히 고문함에 마침내 다리뼈가 으스러졌다.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던 남이는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판단으로 모두 시인하면서 국청에 참석하고 있던 영의정 강순과 함께 공모했다고 진술했다. 무고한 강순은 거세게 부인했으나 결국 남이와 함께 형장에 끌려가게 됐다. 강순이 묻는다. “이 사람아, 죄없는 나를 왜 끌고 들어갔나?” 남이가 대꾸한다. “대감은 영의정에까지 올랐고 나이도 80이라 살만큼 살았으니 결백한 나를 위해 임금 앞에 변명 한 마디는 해 줄 수 있지 않았겠소. 그런데도 무엇이 두려워 변호 한 마디 없었소. 황천 길에 동반자 하나는 있어야겠기에 대감을 짚었으니 너무 억울하게 생각마시오.”

나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순순히 물러갈 수는 없고 검찰총장과 차장이 먼저 사퇴해야 나도 사퇴하겠다는 대구고검장의 항명이 이 고사와 비슷할까. 그렇지는 않다. 남이와 강순은 결백했지만, 현재의 검찰수뇌부와 대구고검장 모두 사퇴 주장의 일정한 근거는 만들어 준 것으로 비친다. 검찰수뇌부는 고검장의 주장으로는 두 정권에 걸쳐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며 검찰의 중립성을 훼손했으며 고검장은 차장의 주장으로는 대전법조비리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항변 ▼

세간에서 ‘기묘검란(己卯檢亂)’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그렇다면 어떤 역사적 사례에 비춰 볼 수 있을까? ‘누가 누구를’ 물러나라고 하느냐는 고검장의 항변에서 레닌의 ‘크토 카보’를 떠올리게 된다. ‘크토 카보’는 ‘누가 누구를’을 뜻하는 러시아어이다. 레닌은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러시아의 정권을 장악하자 신생 소비에트 정권의 운명은 ‘누가 누구를’ 명령할 힘을 가졌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하면서 ‘혁명세력이 반혁명세력을’ 명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을 혁명세력이 독점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검찰 조직은 군대와 경찰 조직과 마찬가지로 ‘누가 누구를’의, 곧 상명하복의 체계가 완벽해야 할 대표적 조직이다. 그런데 이번 검란은 바로 ‘누가 누구를’의 체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도전한 것이다. 따라서 법무부가 우선 직무집행정지 명령부터 내린 것은 이해하지 못할 처사는 아니다.

그러나 여론은 고검장의 문제 제기에 공감하고 있다. 그가 만일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오기에 앞서, 또는 누구에게도 비난의 구실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대검 수뇌부를 비판하고 퇴진을 요구했더라면 훨씬 더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의 검란은 법조계 전체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그에 앞서 도입부적 사건이 일어난다. 우리 정치사에서 한 보기를 들어보자. 꼭 40년 전인 1959년에 일선의 한 사단에서 대대장이 사단장을 사살한 항명사건이 일어났다. 중령 계급의 대대장을 처형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듬해 영관급 청년장교들이 ‘정권의 시녀로 전락했고 부패까지 한’ 장군들에 대해 집단항명하는 일로 확대됐고 그 다음 해에 5·16 쿠데타를 일으키는 일로까지 발전했다.

▼사법개혁의 기폭제로 ▼

또 하나의 도입부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이번 검란의 메시지는 사법개혁 하나다. 그런데도 정부가, 그리고 법조계 전체가 이 역사적 명령에 따르지 못한다면 ‘국민이 검찰을’ ‘국민이 법조계를’ 철저히 불신하여 ‘누가 누구를’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매우 위험스러운 상황이 조성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벌써 피의자들과 피고인들로부터 ‘누가 누구를’ 수사하고 재판하는거요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지 않은가.진부한 표현같지만 법조계는 자기 뼈를 깎는 자세로 개혁에 앞장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김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