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왔다. 오랫만에. 정말 오랫만에. 눈은 너무나 기묘한 사물이다. 그것은 가장 가볍게 없으면서 가장 물질적으로 있다(너무나 무겁게 있으면서도, 정작 후두둑 떨어지느라고 자신의 물질성을 견지하지 못하는 비와 비교해 보라). 눈은 정서적으로 뚜렷한 실체감을 자극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절대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볍게, 가볍게,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고요히 붙잡아두었다가 어느 순간 말없이 조용히 녹아 버린다. 그것은 너무나 있으면서, 동시에 너무나 없다. 아, 저런 방식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눈은 이상적인 사랑의 도식을 상징한다.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상대방의 시선을 갈구한다. 동물 수컷은 암컷의 시선을 붙잡아놓기 위해서 온갖 재주를 부려 자신을 꾸민다. 인간에게 아름다움은 실용성과 무관할수록 진정한 것이지만, 동물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아름다움은 즉각적인 실용성과 연관되어 있다.
구애의 첫 번째 단계는 사랑하는 자의 시선을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의 사랑노래중에서 가장 순진하고 귀여운 사랑노래는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눈 온 듯이 날 좀 보소”라고 노래한다. 여자가 불렀을까, 남자가 불렀을까. 호소하는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의 고요한 스며듦을 사랑의 도식으로 이해할 줄 알았다는 점으로 보아서 틀림없이 여자다 싶지만(그리고 대개 이 노래는 여자들이 부르는 것 같다), 확신은 없다.
눈은 바라보는 자의 시선을 너무나 부드럽게 붙잡아놓는다. 그것은 “날 좀 보소”하고 떼쓰지도 않고, 유난스러운 치장으로 시선을 강탈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다만 가볍게 “아 여기 있어. 당신 그거 알지?”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곤 대지, 모든 사랑이 돌아가 기대는 신성한 타자, 모든 것을 길러내는 생의 터전 속에 고요히 스며들어간다. 눈은 여자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존재한다.
눈이 내리는 날, 나는 행복하고 동시에 불행하다. 눈이 내 안에 오랫동안 짓눌러두었던 초월성의 감각을, 살아가는 것이 갑자기 힘들어지게 만드는 너무나 예민한 감각을 부드럽게 일깨우기 때문이다.
김정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