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때보다도 밝은 희망을 걸어보며 새해를 맞았지만 우리 민초들은 여전히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 IMF의 탓만이 아니다. 정객들의 끝없는 정쟁과 권력투쟁 등 정치의 중압이 더 국민 대중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치와 권력이 ‘필요악’이라고 하지만 한국사회처럼 정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권의 힘’이 최우선시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 중도적 인재 등용해야
정치적 사건과 정치권의 동향에만 온통 관심이 몰려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한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여 대성하기 보다는 학연 지연 등 연줄을 찾아서 정치권에 ‘줄서기’를 잘하는 것이 빠른 출세의 길이라는 생각이 만연하고 있다. 더욱이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하면, 단번에 팔자를 고치고 부와 명예 등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정치 도박’에 인생을 걸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극도로 ‘정치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각 분야에서 자기 전문영역을 지키면서 성실히 노력하여야 할 기업인 관료 언론인 교수 사법인 그리고 과학자들이 정치권력 때문에 의욕을 잃고 허무감에 빠져가고 있는 것 같다. 한 예로서 한 관료가 성공하려면, 자기 직무에 충실하기 보다는 정치판의 세력 변화를 민감하게 읽고 줄을 잘 서야 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정치화되어 있으니 모든 분야에서 성실히 노력하는 전문가들이 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정치화되고, 정치권의 지배를 받고 독립성을 잃으면 민주정치는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국민과 같이 자기 영역을 충실히 지킬 때 사회의 힘이 축적되고, 그 힘으로 정치권력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어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현재 우리 사회는 민주화, 정권교체 못지 않게 아니 그것을 위해 모든 분야가 정치권으로부터 독립하는 ‘탈정치화’라는 국가적 과제에 당면해 있다고 판단된다. 현재와 같은 ‘정치의 과열화’는 아주 잘못된 것이며 심히 걱정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정치권에 바라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도 이제는 민주화투쟁과 새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참여한 정치인보다는 범국가적인 인물 혹은 정권투쟁에 초연한 중도적 인재를 발굴 등용하여 국가통치권을 중도화하였으면 하는 점이다. 이 길만이 현재 심악(甚惡)한 수준에 이른 정쟁을 완화시키고 국민을 통합시키는 유일한 길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 국민통합시대 여는 길
한 정권이 그 정권의 탄생에 기여한 충성스러운 자기파 정치인들을 등용하여 중용하면 할수록, 상대 세력들은 그 정권의 목적이 자기파들의 파괴에 있다고 의심하여 생존을 위한 극한투쟁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믿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분단 이래 과거 냉전 50년의 한국정치의 특징이 붕당과 파벌을 중심으로 정권에 충실할 자기파 사람만 등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는데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초당적 인물이나 중도적 인물은 요직에 기용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아마도 역대 정권들이 합법성 보다는 물리적 힘에 의하여 탄생하였기 때문에, 그 정권 유지를 위해 충실한 파벌 정치인들만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민의 정부’는 합법적 선거절차를 거쳐 힘이나 강압이 아닌 국민의 뜻에 따라 탄생하여 확실히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현 정부는 정권 창출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권에 대한 충성심의 기준으로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다. 모든 국민이 국가를 위해 현 정권의 유지와 개혁 추진을 지지하는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지역 학연 그리고 현 정권 탄생에의 기여도로 충성심을 판정하는 것은 새 시대에 맞지 않는 기준이다. 과감하게 능력위주로 초당적 인물이나 중도적 인물을 등용하는 것만이 민족통합을 얻어 새 시대를 여는 길이다.
현재 우리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국민의 분열과 정객들의 심악한 정쟁이다. 이 문제의 해결이 IMF와 남북문제 해결의 첩경으로 믿어진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탈정치의 길이기도 하다.
이호재(고려대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