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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체코동화「여우씨 이야기」

입력 | 1999-02-08 19:48:00


안도현의 시에서처럼, ‘한숨 자고/고구마 하나 깎아 먹고//한숨 자고/무 하나 더 깎아 먹고//더 먹을 게 없어지면’ 하얗게 깊어가는 겨울밤…, 문득 ‘그리운 여우’가 보고 싶지 않은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가.

눈이 많이도 오시는 날 밤,눈발 속을 헤치고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어쩌면 시인의 말대로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그 여우가….

체코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우는 요제프 라다의 판타지 동화, ‘여우 씨 이야기’(비룡소)는 바로 그 여우 이야기다. 저 멀리, 눈 많은 동유럽의 나라에서 꾀 많고 정 많은 여우 한 마리가 여기, 이곳에 모습을 나타냈달까. 이모저모 궁리가 많아 곧잘 사람을 골탕먹이기도 하고 제 꾀에 제가 속어넘어가기도 하는 귀엽고 깜찍한 여우. 그 천진난만하고 사고뭉치인 여우 이야기 한 토막.

한번은 여우 아니, ‘여우씨’(사람 말을 알아들으니 존칭을 붙여야지요)가 호몰리 산 기슭에 있는 조그만 외딴집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늙은 너도밤나무 다섯 그루가 우뚝 솟아 있어 ‘너도밤나무 오두막’이라고 불리우는 산지기 부부의 집이예요. 탐스러운 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던 산지기네 집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여우씨. 마침 산지기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어리석은 여우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어느날 여우 한 마리가 포도밭 옆을 지나가다가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보고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지. 그래서 어떻게든 따 먹으려고 몇 번이나 팔짝팔짝 뛰어 보았단다. 하지만 포도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먹을 수가 없었어. 그러자 여우가 이렇게 억지를 썼지. ‘이 포도는 틀림없이 시큼할거야. 누가 이따위 맛없는 포도를 먹는데?’하고 말이지….”

이 이야기를 들은 여우씨는 씩, 웃었어요. 그리고는 곧장 산지기네 집 헛간으로 달려가서 사다리를 빼냈어요. 개들이 짖어댔지만 줄에 매여 있어서 여우씨는 느긋했어요. 그런 다음 여우씨는 포도덩굴이 빽빽이 엉켜 있는 벽에다 사다리를 세웠죠. “나는 너무 똑똑하다니까!”

여우씨는 우쭐대며 잽싸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침을 꼴깍거리며 큼직한 포도송이로 손을 뻗었어요. 하지만 포도송이를 따서 입에 한 알 넣는 순간, 여우씨는 얼굴을 찌푸리며 부르르 치를 떨었답니다.

“풋,퉤퉤! 정말로 시큼하잖아….”

체코 근대 회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알려진 작가.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정감어린 삽화에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에피소드를 담아 ‘어린이 판타지 문학’의 보물창고를 활짝 열어제킨다.

동유럽의 아름다운 자연과 농촌생활을 배경으로 여우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펼쳐나가는 이야기. 거기에는 어른이든 아이든, 읽다보면 절로 환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산 머루 맛이 우러나온다. 자연과 어울려 모두가 하나가 되는 삶의 순박함, 간소함 속에서 담백하고 잔잔한 유머가 배어나온다. 햇살과 나무꾼 옮김. 6,500원.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