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작은 실수에도 화내고 토라져 그 의미를 확대해석하고 사과를 받아내야, 자신이 함부로 취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안정이되는그런 사랑이 있는가 하면, 전혀그렇지 않은사랑도 있다.
나는 전자를 ‘옹졸한 사랑’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안 옹졸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뭐 그딴 엉성한 구분이 있냐고 토달지 마시라. 옹졸하게스리.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옹졸한 사랑을 하는가. 혹 작은 것에 집착하며 자꾸 확인하려는 건 성장과정에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애정결핍이 가져 온 방어기제와보상심리가 아닌가 이 말이다.
최근 박세리 파문은 ‘귀화’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시작됐다. 우리에게 ‘귀화’는 이미 가치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귀화’에는 ‘일본’에서의 차별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히 한국인으로 남아주길 바랬던 아쉬움이 엉겨있고 그래서 손쉽게 ‘조국’과 ‘배신’이란 단어와 맞닿는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미국 시민권 취득’에 귀화라는 표현을 썼던가. 그건 조국과 배신 대신 실리와 필요라는 단어가 적당한 경우 아닌가. 사실여부를 떠나 단어선택에서부터 이미 삐딱했던 거다.
우리에겐 천재와 영웅이 별로 없다. 이유는? 천재적, 영웅적 자질이 있는 사람이 워낙 없어서? 웬만한 실수나 의구심에는 꿈쩍않고 언제나 자기 편이 되어줄 것임을 알기에 저절로 안정감을 주는 그런 ‘안 옹졸한 사랑’, 그걸 우리네 천재와 영웅들은 받아본 적이 없다.
‘후천성 집단 애정결핍 증후군’…. 해방 후 우리 사회가 지금껏 성장하면서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총체적 집단 애정결핍에 시달려 왔나부다. 그러지 않고선 이렇게까지 범국민적으로 옹졸할 순 없다. 이제 제발 우리도 ‘안 옹졸한 사랑’ 좀 하자.
김어준(딴지일보발행인)ddanji@nets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