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소설]오래된 정원(41)

입력 | 1999-02-17 19:42:00


오늘은 당신이 떠난 지 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나도 그동안에 변화가 좀 있었어요. 제일 먼저 학교에 나가는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즉 교사를 그만둔 거죠. 지난 겨울방학 때에 사직을 하고 말았어요.

당신에게 도피처를 마련해 주었다는 걸 학교에서도 알았고 교육청에서두 난리가 났었다지요. 나는 당신의 내연의 처가 되었구요. 그러나 당국에서두 심하게 다루지는 않더군요. 다만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세밀한 조사를 받노라고 보름이나 걸렸어요.

여기서 정말 아무 것두 안하구 마냥 쉬다가 대학원에 진학하기루 했어요. 우리의 저 유장한 시간을 소모할 무언가가 필요할 테니까요. 이 노트의 절반은 내가 여기서 혼자 지내면서 적어둔 것이고 이 뒤부터 갈뫼에서의 나는 여름과 겨울 두 철 밖엔 없는 셈이에요.

머리말처럼 그런 글이 맨 앞장에 적혀 있었으니까 아마도 이 노트를 다 썼을 무렵에 적어 놓았을 것이다.

선배 언니로부터 K시 사태와 관계있는 사람이 나를 찾아오리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나는 참 운이 나쁘기도 하지. 보통 때처럼 여행 삼아 남도를 한 바퀴 휘돌아 지날 적에는 아무 일도 없더니 그래두 졸업하고 직업이랍시고 임용고사도 치르고 어렵사리 얻은 교직인데, 느닷없는 책임이 생겨나다니요.

그것도 나를 걸고 감당해야 할 커다란 짐이. 내가 서울 그 언니네 작업실에 들르지 않았다면, 신부님에게서 비디오를 녹화해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참극이 있던 기간에 전라도에 있지 않았다면, 한 시대를 얼마나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요.

재수가 정말 없었던 거예요. 그럼 나는 그전에는 재수가 좋았던 여자였나. 내가 우리 엄마의 딸인 한 재수가 좋았을리 있겠나요.

나는 당신을 처음 고향 다방에서 만났을 때 거기가 바로 경찰서 앞이라서 긴장하기도 했지만 조명이 어두워서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어요. 시장 쪽 선술집으로 옮기고나서야 당신을 관찰하게 되었죠. 내가 당신의 이름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 너무나 분명하게 가명이란 표시가 나는 이름을 대어서 나는 속으로 웃었지요.

당신의 첫인상은 꼭 젊은 날의 아버지를 연상시켰어요. 물론 나는 아버지가 젊었을 때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사진에서 뵙거나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그림쟁이인 내가 재구성해놓은 초상이죠. 아직 나는 당신에게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해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냥 역사적 상처라고 막연하게 미뤄두었지요.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청춘이 깃들인 사진 두 장을 간직하고 있어요. 하나는 동경 유학 시절의 모습인데 사각모에 망토를 걸치고 있어요. 누렇게 퇴색한 옛날 사진의 인물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어른스럽고 무슨 현자처럼 은근한 권위가 있어 보이는 걸까.

아버지는 그 시절에 고작 헤겔 또는 포이에르 바흐에서 이 사진을 찍을 무렵에사 막 엥겔스와 마르크스로 넘어갔을텐데. 간다의 고서점 골목에서 문고판 ‘자본’이나 ‘선언’을 찾아 읽었으리라.

또 하나는 이게 바로 문제의 사진인데 시월 항쟁 이후의 침체기에 찍은 마지막 사진이어요. 아버지는 전후의 거의 짧은 머리 일색이던 시절에도 인텔리 특유의 가운데 가르마를 탄 긴 머리를 하고 상의는 국민복 비슷한 목까지 잠그는 닫힌 옷을 입고 있어요.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아버지는 그 무렵에 일년 반 동안이나 집에 오지 못했대요. 그래서 활동 지역인 어느 도시에 나와 사진관에서 한 장 찍어서 설 때에 집에 보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