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시 필리핀을 찾았다. 용맹스러운 해군제독에서 선교사가 되어….
손자의 재롱이나 보며 여생을 편안히 보낼 칠순의 나이에 필리핀 오지의 원주민을 돕겠다며 선교사를 자청한 퇴역 해군제독 한봉규(韓奉圭·70)씨.
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70세는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하기에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다”고 말한다.
78년 준장으로 전역한 뒤 기업체 사장으로 비교적 편하게 노년을 보내던 한씨가 선교사를 자청한 것은 1월.
“내 인생에는 빚이 많습니다. 이땅에 태어났으니 출생의 빚을 졌지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군의 장성을 지냈으니 나라에 빚을 졌습니다. 전역후 사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니 사회에 빚을 졌지요. 하지만 이렇게 편하게 살면 언제 이 빚을 갚겠습니까. 지금까지는 가족과 나를 위해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삶을 남들에게 빚을 갚는데 써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한씨가 자신의 결심을 말하자 박사인 큰딸과 사업을 하는 아들도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목사인 둘째 사위는 자신의 교회가 돕고 있는 필리핀의 선교사 자리를 권했다.
선교사가 학교를 건립하는데 현지 주민을 잘 이해하는 경험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필리핀은 한씨가 대령시절 3년간 해군무관을 지냈던 곳.
더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결심이 서자 한씨는 임기가 1년이상 남은 백화점 사장자리를 미련없이 내놓고 3일 부인 박경진(朴慶辰·67)씨와 함께 필리핀 마닐라 남쪽 1백20㎞에 위치한 바닷가 오지 마을 바탕가스로 떠났다.
“오늘 내가 서있는 자리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 마음이 칠순의 내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봉사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젊어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빈 칠순의 퇴역제독은 이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머나먼 필리핀 밀림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