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학준 칼럼]좁쌀영감식 국정운영을

입력 | 1999-02-26 19:17:00


우리나라 남자들은 ‘좁쌀 영감’이라고 불리면 창피하게 생각하고 ‘호탕하다’ ‘통이 크다’라고 불리면 기분 좋아한다. 그러한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대담론(巨大談論)을 즐긴다. 최근 지식인 사회에서도 21세기가 어떻고 새로운 밀레니엄이 어떻고 아시아적 가치가 어떻고 등 거대담론이 지배적이다. 정치인들이나 고위 공직자들도 ‘거(巨)하게’ 말하기를 좋아해 태평양 시대가 어떻고 탈냉전 시대가 어떻고 제3의 길이 어떻고 등 큰 책의 제목에 해당하는 말들로 화제를 이어간다. 군자는 모름지기 천하대세를 논해야지 도구적 인간, 기능적 인간이 돼서는 안 된다는 공자(孔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론의 영향을 짙게 느낀다.

◇ ‘巨大談論’ 이제 그만

사람이 통이 커서 나쁠 수 없고 거대담론 역시 나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거대담론을 무색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21세기의 태평양 시대를 준비하는 나라,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비하는 나라, 세계화와 정보화에 발맞추는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후진적이며 비합리적인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지난 반 년 사이의 보도만을 중심으로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정부나 은행이나 기업이 왜 그렇게 국제적으로 사기를 당하거나 경영을 흥청망청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가. 무기를 사들여 오는 데 계약을 잘못해 수천억원의 손해를 보았다는 것, 아프리카와 동남아 등지의 엉터리 신용장에 속아 수백억원어치를 수출하고도 한푼도 받지 못했다는 것, 남미의 어느 한국계 자동차 딜러에게 놀아나 역시 수천억원의 돈을 떼였다는 것, 제2금융권 57개사의 투기성 역외(域外) 자금 운용이 서툴러 지난 5년 동안 2조5천여억원을 날렸다는 것, 지방자치단체들이 모두 선거를 의식해 투자를 중복되게 함으로써 국가전체로 수천억원의 손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 등이 그렇다. 며칠 전엔 어느 기업인이 1천2백억원의 외화를 해외로 빼돌린 채 출국했는데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은행해외매각 기업해외매각도 우리의 일방적 손해 위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국민연금 파동, 족쇄 채우기, 그리고 93년 7월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때 우리쪽이 문구를 잘못 써서 오늘날까지도 의무적으로 수입해주고 있는 일 따위는 우리 행정이 얼마나 전근대적인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일일이 예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잦은 이러한 일들은 ‘제2의 건국’이든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병행’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담론으로 풀 수 있을까. 오히려 좁쌀영감식으로 풀 수 있다. 좀스럽다는 흉을 들어도 좋고 졸자라는 놀림을 받아도 좋다. 하나하나 꼼꼼히 구체적으로 따지고 챙겨야 한다. 계약서의 어느 단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신용장의 서명이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나라살림에 손해를 끼치는 일은 아닌가 하고 겁낼 줄 알아야 한다.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이 클수록 더욱 그래야 한다. 국무총리부터, 대통령부터 좁쌀영감이 되어야 한다. 수백억 수천억원이란 천문학적 숫자에 둔감할 정도로 통이 크고 호탕하게 나라살림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군자불기’론에 영향받아 실용주의적 인재들을 중용하지 않고 과학기술을 발달시키지 않은 탓에 중국이 19세기말에 서양에 패배하고 말았다는 막스 베버의 지적에 새삼스레 귀를 기울이고, 그래서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열주의(馬列主義:마르크스레닌주의)의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실용주의 정책으로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평가에 주목해야 한다.

◇ 실용주의 추구하길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걷다가 길에 난 구덩이에 빠진 어느 천문학자를 조롱한 이솝우화는 21세기와 새로운 밀레니엄이란 거대담론에 젖어 일상사(日常事)에 계속 허점을 보이는 우리에게 교훈적이다. 북한이 늘 제국주의가 어떻고 주체가 어떻다는 등 거대담론에 매달리다가 기아 국가로 전락했고 지난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라든지 ‘21세기 태평양 시대의 중심국가가 되자’ 따위의 거대담론에 취했다가 나라살림을 거덜낸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취임 2년차에 들어선 ‘국민의 정부’는 부디 거창한 구호나 거대담론에 매달리지 말고 국민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가 실용주의에 입각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주는 차분하면서도 알찬 정부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