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3·1절이 돌아왔다. 1919년 그 활화산 같던 날들로부터 80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3·1운동으로 표출된 거대하고 폭발적인 민족의 힘에 대해 정확하고 충분하게 의의를 부여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금할 수 없다.
김춘수(金春洙) 시인의 시 ‘꽃’에 나오는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불러 달라는 유명한 존재론적 고뇌의 음성이 3·1운동의 내부에서 울려오는 듯하다.
3·1운동사와 관련한 오류는 차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최초의 독립선언서가 과연 어느 것인가 하는 문제는 3·1운동사에서 가장 핵심사항에 해당하는 명제인데도 해방 뒤에 저질러진 역사 왜곡작업의 함정에 빠져 수십년 동안 수치스러운 혼란을 겪었다.
1919년 3월 중순 만저우(滿洲) 지린(吉林)에서 발표된 김교헌(金敎獻) 등 39인의 독립선언서가 해방 뒤에 돌연 무오년(1918년) 11월에 발표된 사상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둔갑해 해마다 세칭 무오독립선언서 선포를 기리는 기념식까지 거창하게 거행되곤 했다.
3·1운동사 연구작업에도 가장 기본적인 사실 인식에 관한 혼란이 존재한다. 현재 학계에는 3·1운동 참가자들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후 처리지침으로 발표한 14개조의 하나인 민족자결주의를 전혀 모른 채 만세운동을 펼쳤다는 주장이 나와 있다.
그러나 3·1운동 당시에 쏟아져 나온 1차 사료인 각종 독립선언서들과 제1차 세계대전의 진행양상과 파리 강화회의에 관해 줄기차게 보도해온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비롯한 관련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그런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3·1운동을 바로 이해하려면 1차대전이 막을 내린 그 황폐한 시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전국인 세계 열강들이 5년에 걸친 대전쟁으로 승자도 패자도 모두 피폐한 절망의 시기에 우리 민족은 윌슨이 발표한 정의(正義)와 인도(人道)를 바탕으로 한 민족자결주의를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본질적인 한계와 허점을 내재한 것이었지만 우리 민족은 흡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않고 달을 보듯’ 그 새로운 화두에서 느껴지는 고도의 도덕성과 정신성에 매혹됐다.
당시 세계에는 남의 식민지 백성이 된 약소민족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민족자결주의라는 새 명제 앞에서 우리는 거족적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라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내(來)하도다…’라고 외쳤다. 가장 질서를 존중하는 ‘광명정대’한 평화시위로서 민족자결의 뜻을 세계에 발표한 눈부신 민족은 그 시대에 한민족이 유일했다. 3·1운동은 이런 의미에서 참혹한 시기에 인류가 보여준 가장 매혹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이처럼 형이상학적 이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과 기질은 지금도 우리 민족의 유전자 속에 건재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잠재력과 기질을 명쾌하게 비춰낸 거울이었다. 우리의 그런 능력이 지구의 새로운 천년에 크게 기여할 소프트 웨어의 소재가 될 수는 없을까.
송우혜(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