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소재산업은 솔직히 불모지나 다름없다. 당신같은 사람들이 한국기업을 돕지 않는다면 영원히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다.”
96년 7월 미국 실리콘밸리의 IBM 리서치센터. LG화학기술원 여종기(余宗基)원장은 현지에서 3년째 반도체 재료분야를 파고들던 차혁진(車爀鎭·당시 36세)박사를 붙들고 담판을 벌였다. 서울대 대학원(화공학)을 거쳐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차박사는 IBM연구소에서도 최첨단의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LG화학은 당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전자소재 분야가 21세기 회사를 살릴 효자사업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현실은 연구인력을 확보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여원장은 2,3개월동안 차박사의 모든 연줄을 찾아다니며 LG행을 권유했으나 실패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차박사의 애국심에 호소한 것이 효과를 보아 그를 영입할 수 있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가전산업의 메카’에서 최신 동향을 읽고 개발방향을 빨리 잡을 수 있었죠.”
96년말 기술원내 첨단정보소재팀 리더로 부임해 액정표시장치(LCD)용 감광제 개발이란 중책을 맡은 차박사는 가장 먼저 일본을 찾았다. 20여년전 이 분야에 눈을 뜬 일본은 후지올린(후지필름 자회사) JSR 등 최강의 감광제 생산업체를 두고 있었다.
차박사팀은 차세대 감광제 개발의 성패가 화면밝기를 결정하는 ‘투과율(透過率)’을 높이는 데 달려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제품보다 투과율과 명암비를 높이는 것이 과제였다.
소재팀은 틈나는 대로 그룹내 LCD공장을 찾아갔다. 일본 제품을 사용하는 엔지니어들이 쏟아내는 불만들은 곧장 제품개발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차박사는 “국내 C합섬, D화성 등이 모두 감광제 상용화에 실패한 것은 전자계열사를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년여에 걸친 연구 결과 LG화학은 4일 고급TV와 컴퓨터 모니터로 사용되는 LCD의 핵심소재인 컬러필터 감광제(Photo Resister)를 일본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개발해 하반기부터 상업생산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투과율과 명암비가 각각 일본제품에 비해 10,15% 향상된 세계 최고수준의 품질이라는 게 LG측 설명. 차박사팀은 투과율을 높이기 위해 색을 나타내는 안료의 초미립자 크기를 1만분의 1㎜까지 줄였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본제품이 휩쓰는 8천억원대 컬러필터 감광제 국제시장에 당당히 ‘명함’을 내밀게 됐다. 그동안 LCD감광제를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온 국내업체는 연간 1천8백억원 이상의 수입대체 효과와 함께 2조원 가량의 응용기술 효과를 거둘 전망이다.
차박사는 “외국에서 쌓아올린 연구성과를 국내기업의 산업경쟁력 향상에 활용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