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3일은 일본의 당시 메이지(明治)천황의 탄생기념일인 메이지절이었으나, 우리 민족에게는 국조 단군(檀君)이 개국하신 날(음력 10월 3일)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날 개천절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광주고보생 등의 울분에 찬 가두시위로 본격화됐으며 바로 직전인 10월30일에 있었던 광주∼나주 통학열차에서의 여학생 희롱 및 집단충돌사건이 그 도화선으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에서 타오른 항거의 불길은 인근 전남지역에 이어 그해 12월초에는 서울의 대규모 학생시위로 번져 갔으며 개성 인천 원산 평양 함흥 공주 등 전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돼 나갔다. 투쟁형태도 시험거부 동맹휴학 격문살포 가두시위 등 다양한 것이었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에는 모두 1백94개 학교(전문학교 4곳, 중등학교 1백36곳, 보통학교 54곳)에서 학생 5만4천여명이 참가함으로써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으로 광주에서만 2백60여명이 구속됐고 그 가운데 보안법관련자 49명, 성진회(醒進會)관련자 38명, 독서회(讀書會)관련자 90명, 소녀회(少女會)관련자 11명 등 모두 1백70여명이 재판에 회부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학생들은 왜 꼭 그곳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일까.”
3·1운동이래 광주의 대표적 군중시위장소로 꼽혀 온 충장로와 금남로의 정치사적 의미를 연구주제로 삼았던 정호기(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