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산보삼아 걸어가보는 북한산 안의 금선사 가는 길목에 아주 오래 전에 지은 듯한 흙집이 있다. 그 집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신다. 오며 가며 이따금 그 할머니가 골짜기에 나와 앉아 있는 걸 볼 때가 있다. 하루는 지나가는데 할머니가 내 나이를 물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북 말씨가 섞인 말투로 할머니는 고향이 해주인데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작은 놈을 등에 업고 큰 놈은 걸리고 여기로 내려왔다 했다. 피란내려올 때 두평쯤이나 되는 방안에 스무명도 넘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게 되었던 때가 있었는데 남편 잃고 배고파 칭얼대는 두 새끼들을 옆에 둔 와중에도 그렇게 잠이 쏟아져서 앞사람 등판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잤다고 했다. 서로 눈 한번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나를 앉혀두고 할머니의 이야기는 두서없이 계속되었다. 사십여분이나 지나서야 저, 그만 가봐야겠는데요, 할 수가 있었다.
★북한산 흙집 할머니★
한 번은 시골집에 다녀오느라 기차를 타게 되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옆자리에 앉더니 가방 어디선가 귤을 한 개 꺼내 주신 뒤에 얘기를 시작하셨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선 보러 갔을 때 이야기부터 서울에 살고 있는 일곱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내가 정읍역에 내릴 때까지 계속하셨다. 나중에는 내게 하는 건지 혼자 웅얼거리시는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언젠가 집중해서 작품을 좀 써 볼 양으로 제주도에 한달 가량 정착해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 마을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초원이 있었다. 그 초원으로 나가 걸어다닐 적이 많았는데 지나가는 나를 향해 말을 붙여오는건 늘 할머니들이었다. 올해는 당근밭에 당근이 튼실하지 못하다는 말씀을 서두로 기나긴 얘기가 시작되곤 했다. 한번 붙들리면 한 두시간은 할머니들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숙소로 돌아와 거울속의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왜 할머니들은 나만 보면 얘기를 하고 싶어하나? 궁금하기조차 했다.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게 되면 거의 한시간씩 어머니의 얘기를 듣게 된다. 나는 평소에 어머니와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다른 집 큰딸들은 다 에미 편인데 너는 어쩌 나한테 쌀쌀맞기가 살쐐기같다”고 하셨다. 아무 사심 없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오로지 단 한 분. 마음 편하다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지낸 것이 그렇게나 쌀쌀맞았던가.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사실은 그렇게 쌀쌀맞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만 그걸 내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좌우지간 그 이후로 나는 서툴게나마 어머니에게 말을 붙여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속에다가 그렇게 많은 말을 지니고 계신 줄 몰랐다. 어머니의 추억을 통해서 재구성되는 지난 시간들이 세상을 다시 읽게 했다. 가장 강한 줄 알고 있었던 어머니가 가장 약한 여자임도 느껴졌다.
왜 나는 그동안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줄 생각은 못하고 살았나. 그저 말벗만 되어주어도 반은 풀리는 것이었는데. 가끔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사람한테 맞장구를 치며 “우리 엄마한테 그랬단 말야?내가 혼내줄게, 엄마!”그 한마디면 팔십프로는 풀리는 것이었는데.
어머니와 긴 통화를 시작하면서 생면부지의 나에게 말을 붙여오는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그저 말벗이 그리웠던 것이다.
★어머니의 가슴속 얘기★
얼마전에 일 때문에 만났던 어떤 남자배우는 울어야 하는 연기를 해야 할 때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소양호를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은 어쩌다 한 번이지만 무명시절에는 한 달에 서너번씩 어머니와 함께 텐트를 치고 며칠씩 지냈는데 어머니와 단 둘이 캠핑을 하다보니 어머니와 아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소양호 구석구석 어머니와의 추억이 배어있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그 소양호에 갈 생각을 하면 저절로 눈물이 난단다. 그는 일종의 자신의 연기론을 편 것이었지만 나는 그가 어머니와 캠핑을 다닌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나도 이 봄에 어머니와 단 둘만의 캠핑을 꿈꿔본다. 실천할 수 있을지는 너무나 의심스러운 꿈을.
신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