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말을 사랑한다. 해맑은 아기의 웃음을 연상시키는 ‘깡총깡총’이나 ‘야들야들’‘꼬치꼬치’와 같은 의성 의태어들은 너무나 아담하고 단아하다.
또한 극동아시아의 공용어로 한국문화 발전에도 절대적 기여를 한 한문은 대단히 아름답고 듣는 이의 마음을 맑게 한다.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스스로 나타내려는 자는 빛을 내지 못하고 스스로 잘했다고 자랑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성현의 말씀은 우리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한국어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한자병용 논쟁이 있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한자보다 훨씬 이질적인 영어 계통의 외래어가 점점 더 남용되고 있는 것 같다. 세계 질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구사 능력이 중요하겠지만 자신의 고유한 언어문화까지 파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컴퓨터’를 ‘슬기틀’로 바꿔 부를 필요야 없다. 하지만 ‘몸 상태’를 ‘컨디션’으로, ‘연줄’을 ‘빽’으로 부르는 것은 아무런 언어학적 근거도 없다. 더구나 영미권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콩글리시’를 한국인들끼리의 대화에서 즐겨 쓰는 것을 보면 서글퍼진다.
말과 글 뿐이 아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한국에 체류하면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전통과 현대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다고 느꼈다. 전통과 현대문화 사이에 간격이 없는 나라는 물론 없다. 그러나 유럽이나 북미의 대중문화는 엘리트문화에서 파생된 ‘단순화한 고급문화’일 경우가 많다.
액션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초인간적 경찰’은 결국 청교도의 ‘세속의 구도자’‘현실을 과감히 정화하고 개혁하는 위인’이라는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틀스의 음악에서 세련됨과 단아함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그 가사의 자유분방한 내용을 살펴보면 평화주의나 신좌파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에서 요즘 민족의 자랑처럼 받들어지는 영화 ‘쉬리’. 끝없이 잔인한 장면들에서 미국 영화의 냄새가 날 뿐 한국의 고급문화 또는 전통문화와 어떤 연관성도 찾기 힘들다. TV 드라마나 쇼에서도 일본색이 느껴질 뿐 한민족의 문화나 이상은 찾아볼 수 없다.
순수한 한국말의 아름다움, 사라진 것이 어찌 말의 아름다움 뿐인가. 아기의 마음처럼 깨끗한 하얀 옷, 금세 묵향이 배어나올 듯한 고서(古書)들,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아담한 한옥…. 사라진 것들 중에서 내가 제일 아까워하는 것은 1백년 전 달빛처럼 맑고 고요한 미소다. 구한말의 사진에서 사람들이 짓는 미소를 보면 소박함과 조용함, 존엄성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웃음에서는 가벼움과 긴장 잡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성현들의 아름다운 말씀을 받들어 왔던 백의민족은 이제 힘과 부(富)의 물신(物神)에 빠져버린 것일까.
블라디미르 티호느프
△7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96년 모스크바대 박사(한국 고대사) △97년∼현재 경희대 러시아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