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년 동안 소니의 전성기를 이끈 제품이 바로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비디오 게임기였다.
이 아성에 도전장을 낸 것이 세가의 드림캐스트. 세가는 방송매체를 이용한 광고로 공격을 개시했다. 세가의 한 임원이 영업이 부진해지자 도깨비 꿈을 꾸며 결국 운명을 건 개발에 착수해 소니를 꺾게 된다는 일련의 광고였다. 이 광고는 소비자로 하여금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함으로써 일단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게임기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코피 터진 세가의 유카와 전무의 포스터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를 모았다. 이 포스터에 대해 뭔가 말하지 않으면 세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둔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까봐 어떤 자리에서나 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무엇보다 일본은 유행의 나라다. 텔레비전이나 광고에서 혹은 입에서 입으로 유행이 전파돼 온 나라가 시끌벅적할 만큼 휩쓸고 지나간다. 이러한 유행이 일본인들의 생활중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고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주류(主流) 문화라는 해석도 있다.
한국에서 ‘왕따’가 논란이 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일본에서는 ‘이지메’의 폐해가 사회문제가 됐다. 중심을 이루는 흐름에 역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일본 사회에 폭넓게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소비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계층의 하나가 바로 OL(Office Lady)이다. 이들은 높은 구매력으로 일본의 유행을 창조한다. 오사카에는 한정식으로 유명한 H음식점이 있다. 언젠가 저녁시간 식구들과 외식을 위해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필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음식을 먹기 위해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입구까지 길게 줄을 지어 서 있는 광경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H음식점 주인은 “얼마전 고춧가루와 마늘이 들어간 음식이 건강과 미용에 좋다는 TV 방송이 나간 이후 손님이 두 배로 늘었다”고 말했다. 늘어난 손님의 대부분은 물론 OL이다. 일본의 직장여성들은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맛보는 ‘구르메’(미식가를 의미하는 Gourmet의 일본식 발음)를 통해 그들만의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유행이다.
몇년전 OL의 관심사는 온통 샤넬과 루이비통 등에 쏠렸다. 필자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있던 M양도 편의점에서 파는 몇 백엔짜리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돈을 모아 이들 제품을 사들이는데 열중했던 것을 기억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제의 핸드백이나 화장품 등을 사용해야만 유행에 뒤지지 않고 동류(同類) 의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포도주 마시는 것이 전국적 유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적포도주가 몸에 좋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과 상점이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유독 포도주와 관련한 산업은 번창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유행을 반드시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지나치게 유행만을 좇는 세태는 개인의 개성을 없애고 삶을 공허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행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또한 낡고 고루한 습관을 깨뜨리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탁월한 것에 대한 대중의 모방을 유행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서 발전의 계기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일본이 선진국의 훌륭한 제품을 모방하여 그 속에서 그들의 노하우를 알아내고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적인 추세에 민감하게 대처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선진국가를 건설한 일본인들이 다소 지나치게 음식이나 상품에 대한 유행을 좇는다고 해서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윤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