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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허술한 정부기록문서관리]영구보존율 2∼3%불과

입력 | 1999-03-23 19:12:00


《“대통령의 통치사료는 공문서가 아니라 사실상 사문서였다.” 김영삼정부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비서관의 고백이다. 역대 공직사회의 국가기록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다. 이같이 허술한 역사관에서 비롯된 국가 문서관리 관행은 중요한 정책이 어떤 논의과정을 거쳐서 결정됐는지 입증해 줄 중요문서들의 ‘실종’사태를 낳고 말았다. 전두환전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각종 대통령 기록물을 사저(私邸)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행정부도 정책 결정의 책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중요 문서를 파기해온 것이 관례였다.

한때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거대한 기록문화의 유산을 남겼던 우리나라에 어느덧 기록파기 문화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시행해 국가 문서 관리에 일대 혁신을 기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은 멀다. 역대 정권의 문서관리 실태와 문제점 및 향후 과제를 점검해본다.》

―대통령:요즘 보니까 술을 거의 안하누만. 자! 한번 더 하지. 이 한잔 내가 세번 할테니까 세번에 이거 다 마셔버려.

―참석자:예.

―대통령:육군을 위하여!(일동:위하여!) 놀 여가없이 해군을 위하여!(〃) 그 다음에 공군을 위하여!(〃,박수)

―대통령:가만있어 공군총장 안 마셨다. 공군총장 한 잔 벌주. 연합사령관 다 마셨어?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통치사료기록서 중 89년12월26일자 ‘군(軍)간부부부 초청만찬’의 한 대목이다. 대통령이 각군 장성들에게 술을 권하는 모습은 6공정권의 ‘군사문화적’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 이래 역대대통령은 통치사료비서관을 각종 공식 비공식행사에 참석시켜 발언록을 정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기록이 대통령 개인의 자료(資料)가 아닌 역사적 사료(史料)라는 인식은 지극히 미흡했다.

▼통치사료 관리실태

전두환전대통령은 퇴임후 회고록 집필을 염두에 두고 기록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대통령으로 꼽힌다.

최초로 통치사료비서관직을 신설, 3명 이상이 참가하는 공식 비공식모임에는 반드시 배석토록 했다.

지방순시를 위해 비행기 트랩을 오르다 통치사료비서관이 보이지 않자 경호실장에게 불러오도록 지시한 적도 있었다. 매주 열리는 수석비서관회의와 장관의 보고, 정치인 기업인의 비공식 만찬 오찬에서 오간 대화와 지시사항 등도 일일이 통치사료비서관의 노트에 기록됐다.

그러나 전전대통령이 남긴 통치사료의 행방은 묘연하다.

당시 청와대에서 관련 업무에 종사했던 한 비서관은 “각종 말씀자료와 수석비서관 회의록, 수석들이 보관한 문서 등을 연희동 사저로 옮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전대통령측은 “연희동에 보관돼 있는 것은 사진자료집과 신문 스크랩 등에 불과하고 재직시 각종 행사에서 발언한 내용을 적은 통치사료기록서는 우리도 행방을 모른다”고 반박했다.

노전대통령이 82권 1천96건,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이 1백11권 1천6백12건의 통치사료기록서를 남긴 점에 비춰볼 때 이보다 분량도 많았고 내용도 풍부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정부기록보존소와 청와대비서실에 남아있는 대통령 관련기록물은 각 행정부처에서 올린 대통령 결재문서가 고작이다.

현재 정부 문서관리업무의 기반이 되는 구 총무처의 ‘사무관리규정’에 대통령 관련 기록물로 보존토록 한 것은 결재문서 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정권 시절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근무했던 염홍철(廉弘喆·경남대교수)씨는 “비서관들이 만든 보고서는 공문서가 아닌 사문서로 생각했기 때문에 보고 후 보관여부는 비서관 개인이 판단할 문제였다”고 말했다.

김영삼정권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민정수석실에 근무했던 한 비서관은 “일체의 보고서는 ‘보고 후 파기’가 원칙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혹시 나중에 책임져야 할 증거물이 될 수 있는데 이를 문서로 남기려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폐기가 ‘원칙’이었던 정부 문서관리

김영삼정권 시절 삼성자동차 인허가와 관련해 남아있는 것은 삼성자동차가 정부에 제출한 각서와 국회보고서 뿐이다. 나머지는 공무원들에 의해 파기됐다.

1월 경제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당시 담당자는 “문서를 정리하라는 장관의 얘기를 파기하라는 지시로 잘못 파악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환란 책임에 관한 구 재경원이 만든 문서도 예외는 아니다. 97년 발표된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대책’ 등 구 재경원 금융정책실이 마련한 각종 대책에 대해 강경식(姜慶植)전경제부총리가 결재한 원본 문서도 남아있지 않다.

환란규명이 명쾌하지 않은 이유도 문서관리정책의 부재때문이다.

정부기록보존소에 따르면 1년에 약 7백60만건의 공문서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중 영구보존문서는 2∼3%에 해당하는 16만건정도.

나머지는 각 부처 문서담당자의 판단하에 최고 5년간 보존되었다가 폐기되는 문서가 80%나 된다. 심지어 정승화(鄭昇和) 전계엄사령관의 체포에 관한 서류도 10년간 보관 후 폐기됐다고 보존소측은 설명했다.

영구보존문서의 경우 해당 부처에서 13년간 보존하다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하게 돼 있지만 수집률이 7∼8%에 불과하다. 나머지 문서들은 창고에서 썩고 있는지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지 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비공개 문서들도 생산 부처에서 보관하다 보존연한이 끝나면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해야 하지만 이른바 ‘예고문’을 각 부처에 돌려 별다른 이견이 없으면 파기해 왔다는 것이 정부기록보존소측의 설명이다.

각 행정부처의 문서관리 담당자의 전문성이 떨어지고 문서 보존연한이 자의적으로 결정되는 점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민간단체인 국가기록연구원의 안건호(安建鎬)사무국장은 “담당관리들이 문서의 사료적 가치를 생각지 않았고 행정편의위주로 분류보관해온 게 문제”라고 말하고 “특히 지방자치단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