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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게 삽시다 11]일본의 「일하는 노인들」

입력 | 1999-03-25 19:11:00


3월 초 평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의 빌딩가(街) 아카사카미츠케(紀尾井町)의 지하철역. 한결같이 ‘누리끼리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젊은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이들 사이로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형광색 광고 문구. ‘인재파견회사 파소나’. 60세 이상만을 등록시킨 뒤 기업에 이들의 노동력을 ‘공급’하는 곳이다.

90년대 초 금융쪽의 버블이 걷히면서 장기 불황의 늪으로 빠져든 일본. 최근 경제 회복의 미동(微動)과 함께 21세기 일본의 ‘경제 르네상스’를 50대 이상의 ‘시니어 파워’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시니어밸리’의 도전

10일 오후7시 치요다(千代田)구의 뉴오타니호텔 3층에선 무료 창업강좌가 열렸다. 식품업체 시닥스사(社)가 창업의 노하우를 가르치기 위해 96년부터 격주로 열고 있는 ‘시다기업학원’으로 이날의 주제는 ‘법인세, 이것이 포인트다’. 60여명의 수강생 중 60세 이상이 절반. 시닥스는 노인만을 위한 ‘골드세대 기업학원’도 운영하고 있는데 월 수강생은 초기 1백여명에서 두 배 이상 늘었다.

토요타 자동차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97년 퇴직한 모리즈미 하지메(森住元·62)는 1년째 이 두 강좌에 참가하고 있다. 지금은 재택근무 판매사원 10명을 고용해 수입정수기를 팔고 있지만 새로운 창업 분야를 찾고 있기 때문. 일본 통산성 산업정책국 신규사업과 사다미츠 유키(定光裕樹·29)과장보좌는 “2005년이면 일본 인구 4명 중 한 명은 노인이 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정보산업이 미국을 부흥시킨 것과 같이 이제껏 경제 활동의 ‘아웃사이더’로 인식됐던 노인이 일본 경제를 부흥시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노인만 오세요

카마타 쇼우지(鎌田正二·85)가 70년 은퇴한 뒤 화이트칼라 출신을 위해 설립한 도쿄싱크서비스. 반도체 화학 등 과학분야의 특허 내용을 4백자로 요약한 뒤 영어와 일어로 CD롬에 담는 회사로 직원 30명이 모두 60세 이상이다. 이 회사 사장 이토우 마사키(李藤正樹·66)는 질소석유화학회사 ‘모니야마(宇山)’의 사장으로 재직하다 96년 퇴직했다. 당시 연봉은 1천8백만엔(약 1억8천만원). 투자에 따른 위험 등으로 늘 긴장해 지내기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고 싶어 이 회사에 재취업했다. 연봉 3백60만엔(3천6백만원). 사장이라지만 차를 끓이는 일부터 은행구좌를 여는 일까지 직접 처리한다. 과거처럼 일주일에 2,3번씩 ‘접대’할 일이 없어 시원섭섭하다. 그러나 집으로 싸 갈 만큼 할 일이 많아 ‘후방 전장(戰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토우는 “사회와 계속 접촉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도쿄 외곽 치바(千葉)시의 빌딩관리 용역회사 ‘마이스타60’에 들어서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만이 청색 근무복을 입고 앉아 대기하고 있다. 이 회사는 60세 이상의 기술자격증 소보유자만을 고용한다. 2백70명 직원의 평균 연령은 64.5세. 이들은 입사 첫해 2백50만엔(2천5백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불황과 시니어 르네상스

일본 중소기업청의 97년 조사 결과 50세 이상의 창업이 전체의 37%. 또 40대 중년층의 창업은 35%.

30대(전체의 40%)가 주도했던 70년대 초의 창업 1차 붐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 도쿄무역관 김두환관장은 “70년대는 일본이 제조업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던 경제 확장기로 젊은이들이 활발히 경제영역을 개척했지만 지금은 종신고용의 붕괴로 일자리를 잃은 중노년층이 중심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용 환경이 열악해지면서 명퇴나 봉급의 감소를 기다리지 않고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중년층이상이 늘고 있다. ‘시니어 창업’은 이 시대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다.”(요미우리신문 98년 11월30일자)

▼그래도 한계는 있다

일본 총무청의 최근 조사 결과 정년 퇴직자의 약 85%가 창업에 대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중 62%는 ‘현실적으로 창업은 어렵다’고 답했다.‘동경고령자협동조합’은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해 취업을 알선하는 곳. 무네타가 카지타니(鍛谷宗孝·48) 전무는 “수강생이 급증해 1∼3월에는 2천5백여명이 교육에 참가했지만 취업률은 10% 이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도쿄〓이나연기자〉laros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