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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미스터]연봉제 도입뒤 「음모론」 활개

입력 | 1999-03-29 19:06:00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A사의 입사 3년차 정모씨(28)는 최근 그룹내 모든 계열사 사장실에 팩스와 e메일을 보낸 뒤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낙하산’으로 들어 온 오너의 친지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 같은 대학 출신인 김부장이 교묘히 그를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하고 있으며 여기에 끼지 않는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고 있다. 김부장은 또 판공비의 상당부분을….”

★내 귀에 도청장치가?★

IMF체제와 함께 가고 있는 ‘능력제 사회’. 냉혹한 현실에 대한 ‘내성’을 키우지 못한 일부 직장인 사이에 ‘음모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내가 발령 받은 팀은 모두 정리해고 대상자다’‘내 실적이 나도 모르게 팀장의 대학후배인 K의 것으로 둔갑하고 있다’ 등 회사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인사부에 인사고과 점수를 문의해 오는 것이 일반화되다시피 했다. e메일을 통한 문의가 하루 5,6건씩 들어오고 있다. 문의하는 사람은 주로 연봉협상에서 감봉당한 이들이다.” A사의 인사팀김과장(34)은 이같은 현상은 사원들에 의한 ‘음모 시나리오’ 창작 사례가 늘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음모는 없다!★

인사담당자들에 따르면 음모론이 고개를 드는 이유는 ‘수요 공급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 정보 수요자(사원)의 욕구만큼 공급자(회사)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것. 실적에 따라 임금과 ‘목’이 왔다 갔다 하는 요즘 샐러리맨은 회사의 정책에 대한 ‘배경’을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 반면 회사는 인사상의 기밀을 공개하지 않아 그럴듯한 ‘불량정보’가 양산되고 있다”는 김과장의 설명.

일단 생산된 불량정보는 사내 전산망이나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소리없이’ 퍼진다.

★패자부활전★

C전자에는 98년 이후 특이한 영문이름의 팀 수십개가 생겼다. 상당수는 정리 대상자로 이뤄진 ‘패자부활전’ 선수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데 본인이 정리대상이라는 것을 아는 팀원은 많지 않다. A증권에도 이와 유사한 ‘태스크포스’가 있다. 팀원들은 모두 발령을 받으면서 “정리 대상자만 우글거리면 모양새가 안 좋으니 1년간 당신같은 엘리트를 한 명 심어 두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왔다.

이사 승진 1년만에 퇴직한 S그룹 김이사(49). 부장 시절 실적이 저조했음에도 승진하자 주위에서는 “사기를 북돋워 주려는 회사의 배려”로 받아들였다.그러나 그는 시작부터 결말을 알고 있었다.

요즘은 C전자나 A증권처럼 △정리대상자와 동료의 충격을 줄이고 △대상자가 ‘마지막 노하우’로 극적재기할 기회를 딱 한번 더주며 △실력 있는 사람을 내보내는 실수를 방지하는 방법으로 비공개적인 ‘퇴직수습기간’을 두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같은 방식을 ‘음모’로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외부에 ‘무능력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고 대상자가 회사를 떠나도록 하려는 ‘배려’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음모속 음모★

음모의 존재 여부에 상관 없이 ‘음모론’은 일단 조직과 개인의 건강을 저해하는 요소. 정씨의 ‘투서 사건’ 뒤 A사는 그룹 감사를 받았고 얼마 뒤 사장과 이사가 퇴직했다. 이 회사 윤대리(32)는 “실제로 ‘음모’는 없었다는 게 정설이지만 직원들이 모든 부서장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위기가 생겼고 회식자리도 뜸해졌다”고 말했다.

고려대 심리학과 최일수교수(사회심리학)는 “적정수준의 ‘음모론’은 개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기능을 한다. ‘비밀’이 많은 우리사회 구조도 문제지만 자기계발을 게을리 한 채 음모론에 의지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상상하는 음모시나리오의 덫에 스스로 걸려 퇴출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