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산천에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이 왔다.
눈길 가고 고개 돌리는 곳마다 꽃들은 피어나며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울 너머로 핀 하얀 목련이며, 도로변 언덕에 가득 피어나는 노란 개나리꽃이며, 먼 산자락에 붉게 피어나는 아련한 복숭아꽃은 또 얼마나 우리들을 아득한 그리움 속으로 끌고 가는가.
▼가슴속에도 찾아온 봄▼
가난한 먼 마을에도 살구꽃이 피어난다. 거기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굽은 허리를 펴며 마늘밭에 풀도 뽑고, 봄바람 속에서 못자리 할 붉은 흙을 준비하리라. 꽃들은 유행처럼 번진다. 오, 저 꽃 좀 봐 어제 아침에 보이지 않던 살구꽃이 오늘 아침 피어났네. 저녁 내내 피었던 게지. 들판에 보리들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자라고 먼 산골짜기마다 푸른 솔숲 아래 진달래는 피어 세상을, 우리의 심사를 가만가만 흔든다. 곧 산산이 산벚꽃 피어 우리들의 이마를 훤하게 하겠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이 우리들의 가슴 속에도 온 것이다.
섬진강 호숫가 작은 언덕을 올라서면 거기 작은 학교가 있다. 작은 운동장에 아이들이 봄볕에 까맣게 타서 뛰어놀고 있다. 학교 뒷동산 작은 솔숲 소나무들은 아이들의 고함소리로 맘껏 푸르러지고 그 소나무 아래 진달래 꽃은 피어 붉다. 학교에 들어서면 우리반 1학년인 다희와 창우가 나를 기다린다. 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을 갓 넘긴 창우와 다희는 날마다 학교에 나오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 공부시간에도 곧잘 하품을 해서 나를 웃긴다. “창우 잠오냐?” 그러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셋은 아침이면 날마다 학교 뒷산 솔숲에 든다. 내가 뛰면 창우와 다희도 뛰고, 내가 느시렁느시렁 걸으면 창우와 다희도 느시렁거리며 걷는다. 솔숲 아래는 벌써 수많은 풀잎들이 돋아난다. 창우가 앞서 걷다가 쭈그려 앉아 양지 꽃을 보며 무슨 꽃이냐고 묻는다. 다희가 묘 가에 핀 제비꽃을 보며 앉는다. 우리 셋은 그 꽃들 옆에 앉아 한참을 도란거리며 논다.
▼아이들과 동산에 올라▼
우리들은 조금 더 넓은 빈터에서 물 가득한 호수를 바라보며 맨손 체조를 한다. 솔잎들 사이로 보이는 아침 물빛은 바람없이 아름답다. 다희와 창우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내 맨손 체조 흉내를 내며 깔깔거린다. 우리들은 커다란 아름드리 소나무에 우리 등을 기대고 서서 울울창창한 소나무들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다람쥐들이 돌아다니고, 청솔모가 나뭇가지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휙휙 날아다닌다. 솔숲 아래 도토리나무 오리나무 때죽나무 잎들이 이제 더는 못참겠다는 듯이 툭툭 터진다. 마치 창우와 다희의 세상을 향한 손짓 같다.
세상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뛰노는, 꽃이 피는 봄날의 아이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이 언제 정말 저 아이들을 위해 우리들의 정성을 다 모은 적이 있었던가. 우리들이 언제 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위해 살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가’를 조용히 가르친 적이 있었던가. 우리들이 언제 저 아이들에게 평화와 사랑과 공동의 선을 차분하게 가르친 적이 있었던가. 우리의 지도자들이 언제 한번 우리의 아이들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인간다운 세계를 가꾸어 가도록 했던가. 아아, 다하지 못한 내 말들이 저렇게 꽃이 된다.
▼어떤 삶이 사람다운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이 아름다운 산천을 보며 진정으로 생각할 일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들은 왜 사는가 말이다. 어떻게 사는 게 사람다운가. 그리고 물을 일이다. 혹 애국이라는,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나는 나의 영달을 위해 이 하루를 부끄럽게 살지는 않는지. 저 피어나는 꽃들에게 이 아침 다시 물을 일이다. 나는 꽃이 필 가슴이 있는가. 나는 이 아침 당신들에게 꽃 가득 피어나는 환한 꽃산 하나를 안겨 드리고 싶다.
학교에 가면 다희와 창희가 있을 것이다. 막 피어나는 새 잎 같은 아이들을 생각하라. 그러면 그대 가슴에도 이 봄 꽃이 환하게 피리라. 싱그러운 봄, 활기찬 봄이 그대 가슴 가득 담기리라.
김용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