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3·1운동 80돌 특별기획]89년 민간인 방북 통일논의확산

입력 | 1999-04-08 19:33:00


“나는 이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의 마음,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쳤던 장준하의 마음을 스스로의 마음으로 하면서 김일성(金日成)주석 동지를 만나고자 합니다.”

89년 3월25일 북한 평양방송이 보도한 고 문익환(文益煥)목사의 평양 도착성명이다. 문목사의 방북사실은 당시 남한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80년대 재야민주화운동의 대부였던 문목사는 일행 2명과 함께 45여년 ‘금단의 땅’으로 여겨졌던 북한 땅을 밟아 김주석과 회담을 갖고 허담(許錟)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연방제 통일 원칙 등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방북은 국내에 용공시비와 통일방안에 대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목사 일행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닷새 앞선 3월20일엔 작가 황석영(黃晳暎)씨가 역시 일본과 중국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

잇따른 방북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6월30일 당시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학년이었던 임수경(林秀卿)씨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대표 자격으로 방북한 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 그는 구김살없고 발랄하면서도 소신이 뚜렷한 언행으로 북한에서 ‘통일의 꽃’으로 불리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임씨는 그의 귀환길에 동행하고자 파견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문규현(文奎鉉)신부와 함께 8월15일 분단 40여년만에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통일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자신의 방북목적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그의 방북은 남한에서도 학생들과 일반시민에까지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으나 실정법 위반논란과 ‘북의 의도에 놀아나는 행위’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문목사와 임씨 등의 방북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이들의 방북사건은 그 타당성 여부에 대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민간이 남북대화에 뛰어들었다는 점과 당시 일기 시작하던 통일운동을 대중화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 당시 국내외 상황

80년대 후반은 국내외적으로 통일문제를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는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는 소련의 개혁 개방노선으로 시작된 탈냉전이 본격화됐다. 국내에서는 87년 이후 성장한 민주화운동세력이 사회개혁과 민주화를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을 분단구조로 인식, 통일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전개해나가고 있었다.

88년 봄부터 학생운동의 대표조직인 전대협이 ‘조국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해 7월20일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등 11개 재야단체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를 결성, 통일운동에 나섰다.

당시의 노태우(盧泰愚)정부는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민간통일운동에 대해 ‘수용과 무마’를 병행하는 대응책으로 7·7선언과 남북공동체 통일방안을 잇달아 내놓았다. 이 제안들은 분단된 민족의 역사적 대립을 반성하면서 남북한 화해와 이에 기초한 민족공동체의 수립을 제의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이같은 선언과는 달리 당시 동구권의 변화를 북한고립정책의 계기로 삼으려 했던 6공정부는 ‘창구단일화’ 논리로 6·10 남북청년학생회담과 8·15 범민족대회를 모두 막았다.

그러나 통일열기는 이미 종교계와 예술계, 노동계와 해외동포에까지 들불처럼 급속히 번져가고 있었다. 남북의 적대적 대결의식이 약화되고 동족의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급속히 힘을 얻었다.

◇ 방북사건의 성과

노정권은 방북인사를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해 민간통일운동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후 통일운동의 열기는 조금씩 시들어갔지만 민간통일운동은 남북 당국의 등을 떼미는 효과를 발휘해 91년 12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획기적 전기인 ‘남북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기본합의서)’체결로 이어졌다.

김기정(金基正·현대정치사)연세대 교수는 “실정법 위반과 운동의 이념적 배경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 민간통일운동이 통일논의를 활성화시키고 남북 정권의 통일정책까지 변화시켰던 것은 큰 성과”라며 “당시 통일운동의 열기와 기본합의서내용을 이후 정부에서 구체적인 정책으로 현실화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이승환(李承煥)사무총장은 “일련의 방북사건은 당시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통일 열기의 반영이었으며 남북의 교류와 화해의 계기를 열겠다는 순수한 의도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훗날 민주통일정부가 세워지면 89년에 있었던 민간 방북사건은 통일로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

《‘임시정부에서 통일까지’시리즈가 10회 ‘문익환 임수경 방북’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1919년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이은 임시정부 수립 이후 한국현대사를 조명한 이 시리즈는 그동안 광주학생의거 김구(金九)선생암살 조봉암(曺奉岩)진보당당수처형 3선개헌 10·26과 12·12사태 등 한국역사를 격동케 한 굵직한 사건들을 조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