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배경은 일본 천황의 한국 방문을 눈앞에 둔 시점이다. 편견과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재일 한국인 강형사가 천황의 경호를 위해 한국 경찰청에 파견근무차 도착한다.
그런 강형사를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반 쪽발이’라며 학대하는 강형사의 이복형제이자 한국측 경호 책임자인 전부장. 어릴 때 일본인 5명에게 집단 유린을 당하고 부모마저 잃은 채 그 한을 갚기 위해 천황을 죽이려는 저격수로 성장한 민비.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본 천황의 경호 업무를 맡고 어쩔 수 없이 친여동생인 저격수를 살해하고 절망과 비탄에 몸부림치는 비극적 인물 한국의 여형사 김.
요즘 내가 땀흘리며 연습에 몰두하는 연극작품의 줄거리다. 제목은 ‘뜨거운 바다―도쿄에서온 형사’. 4월 중순 대학로 문예대극장에서 막이 오른다. 재일교포 천재연출가 쓰카 고헤이(한국명 김봉웅)의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공연할 계획이다.
무대 위에는 한국인 재일한국인 일본인들이 등장한다. 한국과 일본간의 얽히고 설켜 풀리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그 아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오늘날의 한일 관계를 심층적으로 묘사한다. 왜곡된 역사속에서 국가와 국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편견과 갈등, 고통과 희망, 한과 화해….
우리는 연습에 들어갈 때마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의 교차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뜨거운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지난 달 한일어업협정 문제로 나라안이 뒤숭숭할 때 오부치 게이조 일본총리가 방한했다. 당시 고려대 강연을 마친 오부치 총리가 쓰카 고헤이를 만나러 우리 연습실을 찾았던 일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오부치 총리는 이번 작품의 일본공연 계획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 공연 때 꼭 관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한일 문화교류에 든든한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우리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총리방한에 즈음해 다시 일기 시작한 반일감정과 과거사 해결촉구 움직임 속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을 맡은 나는 착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두 나라 사이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쌓여 있다. 예술을 바라보는 미학적 관점이 매우 뛰어난 사상가 게오르그 루카치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해결책이 없는 갈등이란 있을 수 없고 극복 불가능한 장애물 또한 없다”고 말했다. 일본 문화가 개방된 지금이야말로 대승적으로 두 나라의 문화의 만남과 충돌 속에서 새로운 역사와 에너지를 창출해내는 지혜와 힘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 나는 한국공연은 물론 일본공연을 위해 그 어떤 작품보다 강한 의욕을 다지고 있다. 우리 연극인들이 일본 연극인들을 앞서 나가는 힘과 열정, 그리고 창조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싶다. 한국인의 우수성과 대담성, 결코 지지 않겠다는 은근과 끈기의 승부 근성을 가지고 일본공연에 정면으로 승부를 걸 생각이다.
연극 속의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가슴 속에 맺혀 있던 한과 응어리를 토해내면서 갈등하는 가운데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종국에는 반성과 화해의 공감대를 이루어가는 무대를 지켜보면서 객석에서는 어느새 잔잔한 감동이 일어난다. 나는 오늘도 그런 연극을 꿈꾸며 변함없이 무대를 향해 달려간다.
나는 예술가, 나는 자유인.
김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