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매우 가까운 미국과 캐나다의 관계가 갑자기 긴장된 일이 있었다. 1961년에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캐나다 총리 디펜베이커가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만난 직후 회담 장소에 떨어져 있던 케네디의 메모지에 디펜베이커를 가리켜 ‘SOB(×새끼)’라고 휘갈겨 쓴 것이 발견됐다고 주장한 캐나다쪽에서는 “아무리 자기들끼리의 은밀한 교신이라고 해도 한 나라의 총리에게 어떻게 그처럼 무례한 표현을 쓸 수 있느냐”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더 심각했던 일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일어났다. 1984년에 당시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텔레비전 연설에 앞서 음성 시험을 받게 되자 “소련은 악마의 나라로 멸망돼야 마땅하다”는 취지의 짧은 말을 했던 것인데, 백악관의 실수로 이 부분이 방송에 나갔기에 소련이 노발대발했던 것이다.
◆ 국정책임자 말의 무게
며칠 전 북한에 대한 청와대의 시각이 보도되면서 크게 시끄러워졌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수십년 동안 요구해온 북한이 최근에 와서 주한미군의 성격을 평화군으로 바꾼다면 인정할 수 있으며 이 문제를 4자회담 의제로 채택하자고 제의했다”고 소개한 것이 논란의 발단이 된 것이다. 이어 “북한이 주한미군의 철수가 아니라 주한미군의 지위변경을 요구하는 것으로, 한국 정부는 이 요구를 전향적으로 다뤄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담은 청와대 고위당국자의 배경설명이 뒤따르면서 파장이 더욱 커졌다.
한편으로는 북한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가에 대해 의문이 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와대가 주한미군 문제를 안이하게 다루고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주한 미군은 한국군과 함께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적 기둥이며 한미 양국간의 매우 중요한 공동 관심사인데, 근거도 분명하지 않고 내용도 충실하지 못한 북한쪽의 한두마디에 쉽게 이끌려 주한미군의 지위변경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국민의 눈에는 경솔하게 비친 것이다. 게다가 외교통상부장관은 북한쪽이 그러한 제의를 한 일이 없다고 공식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인지, 그리고 정부 내부의 관련부서들 사이에서는 정보교환과 의견조정이 없었다는 것인지…, 쉽게 말해, 매우 중요한 나라일에 대한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허점이 크다는 질책이 확산된 것이다.
청와대 보좌진이, 불안하게 바라본다. 햇볕정책이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빨리 보여주려고, 게다가 남북고위회담을 빨리 성사시키려는 맹목적 집착에서 북한의 전략전술을 우리쪽의 ‘희망적 사고’에 따라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재빨리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 회의를 열어 주한미군의 지위변경 문제는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된 뒤에야 논의한다는 종전의 입장을 재확인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청와대는 이번 일을 뼈아픈 반면교사로 삼아, 특히 북한문제를 포함한 대외문제와 관련해서는 신중하고 사려 깊게 언동하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임금님의 말씀은 한번 몸밖으로 나가면 안으로 끌어 담을 수 없는 땀과 같으니(윤언여한·綸言如汗) 편언척구(片言隻句)라도 조심하라던 조선왕조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냉전체제가 해체된 뒤 사람들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표현으로 “인류는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판자들이 예언했던 대로 인류는 ‘새로운 세계 무질서(New World Disorder)’를 향해 움직여 온 것 같다. 무역전쟁, 경제전쟁, 종교전쟁, 인종전쟁, 문화충돌 등이 중요한 원인들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냉전’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유고 사태가, 아시아에서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개발이 그것을 자극하고 있다.
◆ 北 이중전략 직시하길
탈냉전의 화해협력 시대는 21세기 한반도에서 반드시 열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전향적 발상으로 돌파구를 찾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방적 구애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냉전의 개시’란 우려가 국제사회에서 공공연히 나도는 오늘날, 우리를 배제시킨 채 미국과의 대화에만 관심을 쏟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량파괴무기의 개발에 힘을 쏟는 2중전략의 북한을 쉽게 여긴다면 위험하다.
김학준(본사 논설고문·인천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