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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21/비리공무원 사면 虛實]공직부패 추방될까?

입력 | 1999-04-14 20:08:00


《정부가 지난달 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지시를 계기로 공무원의 과거 소액비리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방안을 찾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단절, 그리고 새로운 출발…. 관련 전문가들은 부패의 고리를 끊기 위한 조치로서 그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전비(前非)사면’의 효과에 대해서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엇갈리고 있다.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면권이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기 때문이다. ‘왜 공직자만이 사면대상이 되느냐’ ‘이미 처벌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얼마 이상은 안되고 얼마 이하는 괜찮은 것이냐’는 형평성 논란도 여전하다. 나아가 정치권, 특히 권력층의 과거 비리문제에 대한 ‘고백성사’ 없이 공무원들의 과거 비리를 사면해주겠다는 발상 자체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도 적지않다. 조만간 정부안으로 구체화될 공무원 소액비리 관용조치의 배경과 속사정, 방법론 등을 둘러싼 핵심쟁점들을 살펴본다.》

◇관용조치 효과 얼마나 있을까

“과거를 용서해준다니 고맙다. 그러나 앞으로 잘할 자신은 솔직히 없다.”

공직생활 20년째인 6급 공무원(40)의 말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과거의 소액비리 관용’이 풀어야 할 큰 숙제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관용조치의 의미는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비리를 용서하는 대신 앞으로의 비리에 대해서는 엄한 처벌을 가하겠다’는 것.

그러나 수혜대상자인 공무원들조차 시큰둥한 반응이 많다. 서울의 한 공무원은 “근무환경이나 급여수준 등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과거를 용서해준다고 하루아침에 개과천선(改過遷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과거 어느 나라보다 사면조치가 많아 사면권 남용 논란이 적지 않았던 우리의 현실에서 볼때 이번 관용조치 또한 과거 사례의 반복으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질화된 부패를 청산하기 위한 근본적인 공직사회의 문화와 제도를 바꾸지 않고서는 관용조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번 관용조치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관행화된 촌지나 급행료 전별금 등 소액비리. 그러나 지금까지 감사원 등 공직사정기관에서조차 수십만원대의 관행화된 소액수수는 문제삼지 않은 점에 비춰볼 때 이번 조치는 한낱 정치적인 수사(修辭)에 그치고 말 공산도 크다.

감사원의 한 관계자는 “관용의 액수기준을 너무 낮춘다면 과거의 연장에 불과해 사기진작의 효과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높일 경우 상습적인 범법행위조차 용서하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고 걱정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고위층의 허심탄회한 자기고백이 선행돼야 중하위직 공무원에 대한 관용조치도 설득력을 갖게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양대 양건(梁建)법과대학장은 “부패의 고리를 따라가면 우리 사회의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꼭대기부터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누구나 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사면 방법과 액수 어떻게 하나

어떤 형식을 통해 공무원의 소액비리를 용서해줄 것인가를 두고 행정자치부와 법무부는 △일반사면 △특별사면 △특별조치(훈령 또는 지시) △특별법제정 등 4가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정 수준 이하의 비리를 불문(不問)에 부치고 보다 많은 공무원을 포용한다는 차원에서는 특정 죄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처벌을 면해주는 일반사면이 가장 상징적이고 효과도 크다. 하지만 국회동의가 필요해 언제 시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정치적 부담 또한 적지 않다.

특별사면은 국회동의가 필요없지만 형이 확정된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조치가 시행된 이후 드러나게 될 같은 유형의 과거비리 연루자에게는 관용을 베풀 수 없어 대통령의 당초 의도를 살릴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특별법 제정은 법체계의 혼란을 불러올 수 있고 기존의 형법과 상충될 우려가 있어 법적인 논란이 예상된다.

따라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대통령의 특별조치를 통한 관용이다. 가령 대통령이 ‘년 월 이후 저질러진 원 이하의 비리연루자는 징계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부처별로 이를 뒷받침하는 지침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 이는 앞으로 드러날 과거비리 연루자를 구제할 수 있어 대통령의 의도에 부합하는데다 절차가 간단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리에 대해 포괄적으로 면죄부를 줄 수 있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뇌물액수의 기준도 민감한 문제. 얼마까지 용서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법감정과 과거 관행과의 괴리 △소액 다수 비리에 대한 처리문제 △직급별로 액수에 차등을 둘 것이냐 등을 아울러 검토해야 한다. 행정자치부의 한 관계자는 “과거 별다른 죄의식없이 관행적으로 저질러온 비리유형과, 상식선에서 동정이 가능한 수준의 액수가 기준이 되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공직에 미치는 영향과 문제점은…

공무원 소액비리 관용조치는 공무원의 사기진작과 개혁에의 동참 등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형평성의 파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최근 동아일보가 한솔PCS와 공동으로 실시한 텔레서베이에서 응답자중 67.9%가 이에 반대한 것도 공무원과 민간인간의 형평성 때문이었다. 왜 공무원만 특혜를 주느냐는 것.

법조계에서는 특정 비리에 대해 공무원은 용서해주고 민간인은 처벌한다면 법치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행정자치부는 이와 관련해 “민간인에 대한 별도의 언급이 없어도 뇌물을 받은 공무원을 용서할 경우 뇌물을 건네준 민간인도 당연히 처벌할 수 없다고 봐야한다”며 적용과정에서 형평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간의 검은 거래 △금융기관의 대출을 둘러싼 관행적인 커미션 수수 등 민간인끼리의 소액비리는 관용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형평성의 문제는 남는다.

일부 전문가들은 공무원에 대한 특혜라는 국민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소액의 조세탈루자에 대해서도 비슷한 수준의 관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조세연구원의 현진권(玄鎭權)박사는 “한 해에 부가가치세 탈루가 5조원에 이르는 현실을 감안할 때 소득을 제대로 신고하면 과거의 조세탈루는 문제삼지 않는 조세사면이 이루어진다면 공무원의 관용과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간에도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앞으로 드러나는 과거비리 연루자를 용서해준다고 할 경우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액수의 뇌물을 받았더라도 일찍 적발돼 이미 징계를 받은 사람은 관용대상에서 제외되는 반면 뒤늦게 죄가 드러나는 사람은 용서받는 모순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취재팀klimt@donga.com